아침을 열며-잊어서는 안 될 사람들
아침을 열며-잊어서는 안 될 사람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0.26 16:50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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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환/국학강사
김진환/국학강사-잊어서는 안 될 사람들

우리 역사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위기 속의 나라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자기 몸을 불태워 구국의 등불이 된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호국영령이라 부른다. 고구려가 당 태종의 침략을 받고 안시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이다. 석 달 가까이 두드렸으나 꿈쩍도 하지 않는 안시성을 내려다보며 공략을 시도 토산을 완공하고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고자 하자 고구려는 토산 아래에서 토굴을 파고 일시에 무너뜨릴 준비를 한다. 준비된 공정이 차질이 빚어지고 하는 수 없이 사람이 직접 들어가서 기둥을 무너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자진해서 토공 몇 명이 도끼질로 해서 토산을 무너뜨린다. 그분들은 토산 지하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고려 때이다. 승려인 김윤후가 있었다. 몽고의 2차 침입 때 처인성 전투 때 승려의 신분에 불도보다도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고자 분연히 일어나서 몽골의 대원수인 살리타이를 척살하고 결국 몽고가 물러가게 만들었다. 처인성 전투와 충주성 전투에서는 노비, 승려, 백성들이 하나 되어 몽고를 물리친 항쟁이었고 그의 호국정신은 정규군보다 손색이 없었다. 치열한 전장에서는 선두에 섰지만, 전쟁이 끝나자 한직으로 내몰렸지만, 우리의 기상을 몽고에까지 떨친 인물이었다.

조선 시대 임진 전쟁 시기이다. 정유재란 막바지에 일본의 태합인 도요토미가 죽고 전 일본군은 본국 철수에 여념이 없었다. 순천 왜교성에서 성을 쌓고 농성 중이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원군을 청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지만, 명군의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가며 퇴로를 열어주기를 작정하자 이순신 장군은 지략을 발휘한다. 양쪽을 속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막고 시마즈 군을 관음포로 몰아 몰살시키고자 계략을 써서 밀사를 조선 육군에게 보내며 조선의 작전일지를 노출한다.

이는 목숨이 걸린 작전이었고 수군 중에 처자식을 왜군에게 잃은 이름 없는 수군 한 명이 나선다. 그는 적이 속을 정도의 치밀함을 감추고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결국 참수당하나 그의 죽음으로 우리 조선 수군은 적을 유도하는 데 성공하여 노량 앞바다와 관음포에서 수적 열쇠임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끌어내고 향후 일본은 200년 정도 조선의 바다를 넘보지 않게 된다. 혼이 나간 일본은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순신 같은 조선 수군이 있는지 노심초사하여 약 3달을 조선 해안을 조사하였다는 말도 있다.

일제강점기 때 봉오동전투 시기, 봉오동전투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이다. 전투는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을 유인해 낸 독립군은 일본군 120명을 사살한 뒤 일본군을 계속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몇 명도 되지 않는 젊은 독립군들이 목숨을 걸고 반나절 이상의 유인책을 구사하여 봉오동 산촌까지 일본 정규군을 약 올리며 끌고 갔고, 연합부대를 재편성하여 봉오동 계곡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이 포위망에 들어서자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 정규군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이 압도적인 전승은 이름 없는 그분 덕택이었다.

우리가 아는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이 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고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연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애절하디애절한 이 노래는 가수 김정구 씨가 부른 노래이고 그 배경은 독립운동을 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던 아내의 마음을 달래고자 김용호 씨가 작사하였다.

6.25사변 때 학도의용군이 있었다. 지금 고등학생에게 물어보니 잘 모른다고 한다. 학도의용군은 대부분 나이가 14~17세에 불과했는데, 징집 연령 18세에 미달하였다. 학생들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인민군의 10개 보병사단 150여 대의 탱크, 200여 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남침을 일으킨 상황에서 ‘책 대신 수류탄하고 총을 달라’면서 자원입대하였다. 이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도 못한 채 계급장이나 군번도 없이, 오로지 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이 나라를 지켜내야겠다는 일념으로 책 대신 수류탄 몇 개에다 총 한 자루만을 들고서 우리 국군하고 UN군에 합류하여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피로 우리는 국난을 극복하였다. 우리 역사는 그렇게 이어져 왔다. 이름 없는 구국의 혼들이 우리를 지켜왔고 지켜갈 것이다. 그런 DNA를 국학인이 가지고 있다. 우리는 평소에는 표가 나지 않는다, 다만 필요할 때는 반드시 나선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이것이 국학인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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