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반민특위 선봉 이병홍 국회의원
진주성-반민특위 선봉 이병홍 국회의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1.01 16:0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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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반민특위 선봉 이병홍 국회의원

현포 이병홍 의원은 경남 산청군 단성 출신으로 반민특위 제1조사 부장이고 산청지역 2대와 3대 국회의원(민의원)에 당선되었고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고 국회의장 신익희가 동지라고 쓴 비가 있다.

이병홍 선생은 서울 오성학교(현 광신고)를 졸업했다.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바로 3.1운동을 체험하고 ‘독립선언서’를 바지 대님 속에 감추고 진주시 정촌면에 사는 강재순에게 전달하였고 정촌면민들 서기봉, 유천문, 이준이, 이종열, 이종언 등이 판각을 조각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수 백부를 제작해 진주 남부 일대에 배포하고 5천여 명을 이끌고 칠암동까지 진출하는 등 3.1운동을 지도하신 분이다.

이병홍 선생은 일경의 눈을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로부터 산청군 조사원과 자금 조달을 담당하게 되었다. 1945년 9월 광복 후 한민당 발기인이 되고 ‘조선독립운동사’ 편찬위원이 되었다. 1945년 8월 제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차석으로 낙선했다. 1948년 9월 10일 반민특위가 설치되자 조사 1부장이 되고 임시정부 문화부장 김상덕이 위원장이 되었다. 친일파 최린을 체포할 때 앞장서고 김우영, 이광수 등을 문초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9년 2월 반민특위법의 개정을 요구하자 이병홍 선생이 경향신문에 기고해 ‘조석 변개’라고 비판했다. 1949년 9월 5일 중앙청에서 국회의장, 대법원장(김병노), 국무총리(이범석)가 참석했으며 이병홍 조사부장은 조사 내용을 보고했다. 682건 중에 478명을 구속하고 305명을 체포했으나 결국 11명만 체형을 받고 끝나고 말았다.

1950년 5월 30일 산청지역 제2대 국회의원(민의원)선거에 당선되어 탄핵재판소 헌법 재판관이 되고 사회보건위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5월 21일 총선에서 재선되었다. 1955년 10월 협동조합 문제로 밤새 토론하고 피로가 겹쳐 삼청동 자택에서 양복 입은 채로 별세했고 서울 망우리 용마 순환로에 묘소 안내판이 있다. 반민특위가 해체되지 않고 친일 문제를 해결했다면 오늘날과 같이 혼란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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