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내 인생의 봄날은
도민칼럼-내 인생의 봄날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1.16 15:55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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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선/시조시인·작가
강병선/시조시인·작가-내 인생의 봄날은

베이비붐 세대인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삶을 뒤돌아보면 참으로 비참했었다. 꽁보리밥마저도 배불리 먹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엄동설한에도 운동화는 언감생심이었다. 양말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검정 고무신을 신고 십 리 길이나 되는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에 다녔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가 가장 즐거웠냐?’라고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면 단연코, 그때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이라고 말할 테다.

옛날에 한국전쟁 무렵에 태어난 세대는 지금처럼 장난감 하나도 변변치 못했다. 문방구에서나 완구점에서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돈 들이지 않고 놀 수 있는 놀이가 주를 이뤘다. 제기차기, 연날리기, 공차기도 많이 했지만, 조뽀놀이를 많이 했었다. 8자 모양, 오징어 모양이 있었고 사각 모서리마다 원을 그려 방을 만들고 편을 나눠 밀어내기 놀이였다.

태어나길 워낙 두메산골에 가난한 부모 슬하에 태어나서 그랬는가 싶다. 요즘 아이들처럼 편케 살지를 못했다. 어른들이 하는 일을 흉내 내며 배워야 했고, 농사꾼이 되기 위한 훈련을 해야 했다. 그때는 국민학교인 1, 2학년 어린아이지만 소 몰고 들에 나가 풀을 뜯게 했었다. 나로선 숙제도 하고 친구들과 놀고 싶은데, 소에게 풀 뜯겨 오라고 하면 울면서 소를 몰고 나간다. 풀을 잘 뜯어 먹지 않기라도 하면 소고삐로 머리, 엉덩이 가리지 않고 마구 채찍질해댔다. 엉뚱하게 소에게 화풀이했던 거였다. “이놈의 새끼, 소 새끼야! 너 때문에 나는 숙제도 하지 못하고 놀지도 못한단 말이야.” 이런 말을 한다고 알아들을 수가 있겠는가. 아니 이런 불평을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가 아닌가 말이다.

그때 내 초등학교 시절엔 농번기만 되면 조퇴를 참 많이도 했었다. 집에 모를 심는다거나 벼를 벤다든지 하는 날은 여지없이 조퇴하고 오라 한다. 어쩌다 한번 아니면 두 번이지 너무 자주 조퇴하라 하니, 담임선생님께는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했다. 집에 보내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한 시간이 지나고 2교시가 지나도 말하지 못한다. 점심시간에야 겨우 조퇴시켜 달라고 말씀드리고 작업장인 논에 오면 아버지께 야단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마냥 좋아했던 여름 방학이나 겨울방학은 나로선 싫었었다. 일요일이나 학교 쉬는 날은 논밭으로 불려 다니며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처럼 꿀같이 달콤한 아침잠을 즐길 수 없었었다. 논에 거름 내고 소에게 먹일 풀을 베야 했다. 힘든 일만 하다가 어쩌다 소에게 풀 뜯어 먹게 하라고 할 때는 정말 기분 좋은 날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아이들이 곤히 잠들어 있을 때, 소에게 풀을 뜯기고 들어와 아침밥을 먹고는 부지런히 학교로 향한다. 십 리가 넘는 등굣길은 지각하는 날이 많을 수밖에 없다. 수업 중인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학교가 쉬는 날은 논밭일 외에도 산에 올라 보리 갈 이용 퇴비를 만들기 위한 풀을 베고 땔나무를 해야 했었다. 이런 모양으로 살았으니 초등학교 시절이 불행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위에선 말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초등학교 시절이 행복했었다고, 말해 왔다. 심한 감기에 걸렸을 때를 빼고는 6년 내내 결석하는 날이 없었다. 학교 가기 싫었던 날은 한 번도 없었으니 하는 말이다. 학교 공부가 재미있었고 친구들과 뛰놀며 조잘거리던 그때가 그립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성인이 되고부터는 결혼하고 가장이 되었고 아내와 가정을 유지해야 했다. 자녀를 얻고부터는 어떻게 양육을 시킬 것인가 하는 상념 때문에 잠시도 한눈팔 수 없었다. 내가 살아왔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했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가려운 등을 비빌 수 있다 하지 않던가. 땡전 한 푼 없는 놈이 아내를 처음 만나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정은 참으로 눈물겨웠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제는 고희를 지나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니 편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기저기 아픈데 뿐이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정상인 데가 없다. 노년 맞은 황혼은 지난날을 보상받는 차원에서 아프지 않고 건강해야 하며 맘고생 하지 않고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서두에서 이미 말했듯 내 삶을 돌이켜 보면 그래도 초등학교 시절이 행복했노라고 내 인생의 봄날은 그때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보아야만 하고, 들어야 하고, 거느리며, 꼭 해야 한다 는 강박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멍에가 되는 주어진 책임과 의무가 없었다. 아직 코뚜레를 받지 않은 송아지와 같은 시절인 초등학교 때가 행복했던 내 인생의 봄날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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