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사랑! 그 위대한 이야기
아침을 열며-사랑! 그 위대한 이야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1.20 15:44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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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선/참전용사·국가유공자
허만선/참전용사·국가유공자-사랑! 그 위대한 이야기

지금쯤 내 고향 뒷산 양지볕엔 찬 이슬 머금은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리라. 어릴 적 감기 기운이라도 있을라치면 아버진 구절초 말린 잎과 꽃을 뜨거운 물에 풀어 한 모금 씩 마시게 했다. 씁쓸한 그 맛이 좋지는 않았지만, 근엄하신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지 못해 한 종지 마시고 나면 몸이 따뜻해지면서 콧물이 뚝 멈추었다. 쓴맛 뒤에 안온함을 주는 우리네 인생과 닮은 구절초! 오늘은 그 구절초 같은 두 인생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어릴 적에 주취 폭력이 심한 아버지가 집어 던지는 바람에 척수염을 앓게 된 소녀는 어른이 되어도 키가 143cm에 머물렀다. 어머니는 정신병이 있었고 동생들도 있었지만 그나마 가장인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녀가 남의 집 식모로 삶을 떠안아야 했다. 억척스레 살아야만 했다. 틈틈이 기계 편물 기술을 익혀 기능올림픽에서 1등을 했고 철탑산업훈장도 받았다. 물론 각고의 노력이 오랫동안 있었고, 복지시설의 선생님 도움도 있었다. 자립의 삶을 엮어 나가던 차에 병이 도져서 입원을 했고, 거기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나이 먹어 신학 공부하기가 녹록치 않았지만 이겨 내었다.

“너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아프리카 보츠와나에 갔단다. 원시문명 같은 현지인의 삶 속에서 함께 숙식하며 선교사로서의 참사랑을 쏟아붓고 있는 작은 여인 김해여! 그녀가 아프리카라는 미개한 땅에 뿌리를 내린 지도 어언 14년. 언어, 풍속, 얼굴, 바람도 태양도 낯선 이국에서 얼마나 많은 난관이 있었을지 짐작으로 가늠해 본다. 화려하지 않고 단아하게 피어나는 구절초를 닮아가는 작지만 큰 사랑 여인이다.

쌀쌀한 기운에 어깨가 움츠러드는 늦가을, 휠체어의 바퀴를 굴리며 병실로 가다가 유리창 너머의 까까머리 소녀와 보호자 그리고 의사의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습을 보고 멈추어 섰다. 면역치료, 임상실험, 유잉육종, 완화치료 등의 얘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으며, 보호자는 거의 절망적인 모습이었고, 아이는 축 늘어진 채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공격성이 지독한 유잉육종암으로 면역치료에도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고 임상실험이라도 할 수 없느냐고 보호자는 매달리는 것 같았으며, 혈관종양 전문의로 보이는 의사는 말기암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진통제로 통증을 다스리며 안식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완화치료를 권유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 식물인간 그리고 온갖 병으로 수십 년을 입원과 통원을 반복하다 보니 환자들의 사정을 웬만큼 알 수 있는 필자, 3년 전 앉은 상태에서 일어나려다 푹 고꾸라졌다. 무릎 아래가 비어 있는 듯 힘이 빠지고 감각이 없었다. 신경과에 갔더니 발랑가래인지 갈랭바래인지 하는 증후군이란다. 말초신경을 침범한 바이러스 때문이라면서 점차 상지로 올라 뇌까지 갈 수도 있다나? 오장육부, 성대, 알츠하이머 등등 수많은 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크게 놀라진 않았다. 이미 신경, 피부, 소내, 비뇨, 안과를 비롯한 여러 질병 치료를 수십 년 해 오고 있으니까. 전상에 고엽제까지 말이다.

아름다운 사랑과 애달픈 사랑의 구절초 꽃 이야기를 하려다 석양길 노병의 푸념까지 늘어놓았다. 제발 이 아름다운 계절이 가기 전에 하늘이여 자비를 베푸시어 병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을 낫게 하소서. 꽃잎처럼 아름다운 미소 머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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