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마지막 잎새
진주성-마지막 잎새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2.05 17:0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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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마지막 잎새

벽에 걸린 달력이 달랑 한 장이 남았다. 한 장 한 장 티 안 내고 어느새 떠나가고, 홀로 남아 처량하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만큼 애처롭고 측은하다. 세상사에 부대낀 고단한 영혼들을 건져내려고, 아낌없이 버리면서 마지막 향을 사른다. 향불의 연기는 서럽게도 가녀린데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지 애처롭다. 연명의 줄을 잡고 거미줄에 매달린 낙엽처럼 애잔하다.

새해 아침에 가슴 벅차게 부풀었던 기백을 다 소진하고 지극히 낮춰버린 낮은 자세가 애달프게 숙연하다. 미련도 아니고 집착도 아니면서 못다 한 사연이 그래도 남았던지 제 몫을 마무리하려고 세월의 끈을 차마 놓지 못하고 기진한 모습이 애처롭다. 까닭 없이 맺혀버린 매듭과 고를 풀며 한숨의 긴 꼬리를 사리고 있다. 파르르 손끝이 떨린다. 비우고 비운 속, 이대로도 좋으니 언제까지나 머물고 싶어서 저러는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측은하고 안쓰럽다. 잔설이 녹기가 무섭게 꽃내음을 쫓아 바람 잡고 날뛰던 날의 기억이 두고두고 민망하여, 남몰래 삭여야 했던 회한의 눈물은 꽃샘추위였다.

물소리 새소리는 위안이었고 쉼 없이 불어대는 바람 소리는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성찰의 기회였다. 언제나 끝을 미리 알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리던 날에는 열정의 태양이 영원하리라 믿고 껍죽거렸다. 겁 없는 오만이었다. 천둥소리에 기죽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삼아도 바람에 데인 상처는 흉터로 남았다. 짙푸른 녹음을 배경으로 삼고 멋모르고 우쭐거린 것은 철없는 만용이었다. 서른 밤씩 촘촘히 나의 일기를 쓰고 있는 줄을 이제야 알았다.

서리 맞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양심 앞에 들켜버린 속내까지 이제는 다 털어내고 속울음 울었던 사연도 말해야겠다. 못 볼 것을 본 듯이 손사래를 치며 외면했던 잊어버린 기억도 되돌리고 시나브로 모질어져 식어버린 가슴도 다시 데우며 마지막 잎새를 마주 봐야겠다. 설한풍이 넘보고 있다고 발을 구르고 등 붙일 데 없는 사람들을 만만하게 본다는 귀띔도 알아듣지 못한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기력이 소진한 마지막 잎새는, 이제는 날 선 바람을 막을 재간이 없고 눈보라를 가려줄 여력이 없다. 문풍지가 울던 날에는 도란도란 이야기가 정겨웠고 연탄재가 뒹굴던 때는 아랫목이 따뜻했다. 거울 앞에 서지 못하는 나의 속내를 털어내며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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