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 짜릿짜릿 강가 벼랑길 ‘창녕 남지 개비리길’
아슬아슬 짜릿짜릿 강가 벼랑길 ‘창녕 남지 개비리길’
  • 추봉엽기자
  • 승인 2023.12.10 15:54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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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설화가 함께하는 전설 나들이
사계절 매력 듬뿍 내품는 벼랑길 따라
파란 물결의 낙동강과 어우러져 장관
▲ 창녕 남지 개비리길 전경.

강변을 따라 아슬아슬한 벼랑길이 산허리를 돌아가고 그 좁은 길을 따라 걷는 짜릿짜릿한 쾌감을 맛보고 싶으면 남지 개비리 길을 걸어보세요.


창녕 남지 개비리길은 용산마을(알개실)과 영아지마을을 잇던 위험한 길을 정비한 둘레길이다. 강과 산 그에 준한 절벽 위의 벼랑 산책길은 아지 사람들이 에둘러서 남지읍 장에 가려면 멀기 때문에 벼랑 끝을 따라 길을 만들었다. 마을 사이의 낙동강변에는 마분산이 솟아 있고 깎아지른 절벽 위로 아슬아슬 이어지며 시퍼런 낙동강물과 어우러져 개비리길을 걸으면 짜릿한 맛을 안겨준다. 한 사람 겨우 지날 정도의 그 벼랑길이 요즘 입소문을 타고 있다.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길까지 정비해 숱한 옛이야기를 더한 이야기 길이다. 대한 암흑기에 개비리의 남단이 상당 부분 멸실됐고, 최근 탐방로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옛길 본래의 모습 일부가 훼손됐다. 사계절 매력을 듬뿍 내품는 벼랑길을 걸으며 조망되는 낙동강의 모습이 아름답다. 조선시대 옛길이라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21년 12월 8일 명승으로 지정됐다.

개비리길 입구 계단.
개비리길 입구 계단.
개비리길 입구 계단.
개비리길 입구 계단.

창녕 남지 톨게이트에서 나가 개비리길을 가다보며 먼저 6·25때 허리를 잘렸던 남지철교가 강줄기를 가로 지르고 옛 역사를 간직한 채 지금 차는 다닐 수 없고 사람들만 오가는 하나의 남지 명물로 자리 잡았다.(국가등록문화재, 2014년) 또한 국내 최대 규모(110만㎡)라 일컫는 남지 낙동강 둔치 4월 유채축제라든지 각종 축제일이 되면 이곳 남지철교 난간은 사진들이 전시되는 등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변하는 강물 위의 ‘다리 갤러리’가 된다. 낙동강 둑길을 따라 2km 쯤 줄곧 서쪽으로 가다보면 둑의 끝자락 용산리주차장(창나루 주차장)이 나타나고 억새 전망대가 나온다. 광활한 둔치에 늦 가을을 맞은 억새들이 일렁이는 풍광은 가을 운치의 절경을 보여준다.

이곳은 유유히 흘러오던 낙동강이 진주에서 흘러오는 남강과 합류하는 지점, 아우라지 즉 거름강(걸음강)이라고 불린다. 걸어서 건넜다거나 오물들이 쌓여 거름강인가? 강줄기가 나뉜다고 ‘기음강(岐音江)’이라고도 부른다. 거센 물살과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달라 소리로 구분되는 강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말한다. 이곳에는 40, 50년 전에도 의령서 남지로 통학하는 학생들이나 남지읍 5일 장터로 향한 사람들의 교통수단으로 건너다니는 창나루 터가 있었던 곳이다. 6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지역의 주요 교통수단은 나룻배였다. 나룻배로 건너온 의령 사람들과 벼랑길을 걸어서 오는 아지리 마을 사람들이 동시에 만나는 용산마을이 강변을 따라 남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개비리길에서 바라본 낙동강 전경.
개비리길에서 바라본 낙동강 전경.

강둑 끝 용산리 마을에서 시작되는 개비리길 산책은 2가지로 각자가 선택할 수 있다. 입구 전망대에서 181계단으로 시작하여 마분산(180m) 등성이를 따라 걷는 능선 길과 마분산 산허리로 난 강변 벼랑길을 따라 걷는 개비리길로 나눈다. 어디로 가든지 한 바퀴 둘러서 오면 된다. 한마디로 남지읍 용산리와 양아지 마을 사이 낙동강을 따라가는 2.7km의 벼랑길을 개비리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은 낙동강 강변을 따라 형성된 낭떠러지 길로 바위 절벽(벼랑)을 따라 자연적으로 조성된 길이다.

개비리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아서 수십 미터 절벽 위로 산모롱이를 따라 아슬아슬 이어간다.

개비리길 너비는 1.5m 정도로 좁고 벼랑길이라 짜릿한 맛을 느끼며 양아지 마을입구까지 갔다가 되돌아서 산정으로 한 바퀴 돌아오는 전체 거리가 6.4km이고 누구든지 쉽게 산책할 수 있는 2시간 정도의 가벼운 등산로이다.

원경으로는 강 건너편에 보이는 의령의 오밀조밀한 산세와 모래사장 등 낙동강의 경치를 만끽하며 유독 숨길이 많이 묻어나는 아슬아슬한 절벽을 따라가는 짜릿한 느낌을 주는 특별한 산책로다.

이 길에는 사연을 지닌 각종 나무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마분산에는 의병 옷을 입혔던 ‘마분송’이란 소나무를 비롯 6남매나무 산벗나무, 산신령이 점지한 층층나무, 대나무 숲, 시집보내는 감나무, 연리지 팽나무, 상수리나무, 미루나무 등이 나타난다.

또 개비리길 초입부터 홍의장군 붉은 돌 신발이 반기고 두어 구비 돌면 옹달샘이 나타나고 옥관자바위 층층나무의 전설이 눈길을 끈다. 재령이씨(李氏) 한 집안이 1929년 개비리길 중간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할머니가 꼭두새벽에 매일같이 찬물에 목욕한 후, 옥관자(玉貫子) 바위 앞에 맑은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가정의 무사안녕을 기원했다. 100일 째 날이 샐 무렵 산신령이 꿈에 나타나서 층층나무를 점지해 주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두어 구비를 돌아서면 대나무 밭이 무성하게 조성돼 있다. 여양 진씨 재실인 회락재(匯洛齋)가 있었던 자리로, 방치돼 있던 건물을 철거하고 대숲을 정비해 쉼터로 꾸몄다.

창녕 남지 개비리길에서 만날 수 있는 마삭줄.
창녕 남지 개비리길에서 만날 수 있는 마삭줄.

산모롱이를 따라 돌아나가는 길 양편이나 벼랑길 바위 면에 마삭줄이 엉겨 붙어 5월엔 저마다 꽃을 피우고 한여름의 무성한 신록 등 개비리길은 철마다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강변 쪽으로는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강물이 펼쳐진다. 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강수면에는 윤슬이 뻗친다. 개비리길 후반에 이르면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너럭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중생대 쥐라기 때 번성했던 초식 공룡 용각류(龍脚類)의 것으로 짐작되는 발자국이 화석으로 남아 있다. 이 너럭바위 화석은 1억5000만 년 전에 이곳에 살았던 공룡이 남긴 소중한 발자취다. 당시 이 주변은 대규모 습지 지역으로 현재는 쪼그라진 우포늪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습지 위로 날아다니던 공룡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오랜 세월이 덧쌓일수록 문화유산으로써 그 가치가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공룡발자국 널찍 바위에서 잠시 쉬면서 강을 건너다보면 나뭇가지 사이로 건너 시골 풍경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바람이 살랑거릴 때마다 발아래 강물에서 잔잔한 물결소리가 들린다.

양아지 마을 기점에서 되돌아 마분산 산길로 올라서면 산정 양아지전망대가 나타난다. ‘아까리’, ‘아지’는 앞이 가려져 있는 동네나 앞마을(앞실)을 가리킨다. 아지리에는 영아지와 창아지, 2개의 마을이 있다. 강에는 창아지 나루도 있었던 곳이다. 능선을 따라 용산리(창나루) 쪽으로 걸어가면 수많은 이야기를 만난다.

이곳은 전쟁과 연계된 이름들이 많다. 창나리 마을은 창이 있던 나루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창진(倉津)이라 적는다. 이 마을의 뒷산은 과거엔 창진산(倉津山)이라 불렀다. 창나리 마을의 유래는 삼국 때 낙동강을 경계로 강 건너 백제와 국경을 이룸으로써 이곳 마을에 군사가 주둔하면서 군사용 큰 창고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마을 이름이 ‘창고가 있는 나루’라는 뜻으로 ‘창나리’로 지금까지 불러지고 있으며 줄여서 ‘창날’이라고도 한다. 산 이름도 창진산(食津山)으로 부르다가 임진왜란을 맞아 토성을 쌓고 싸운 곽재우 의병장의 죽은 말 무덤이 있는 산이라 하여 말무덤산(馬墳山) 즉 마분산으로 오늘날 까지 바꿔져 불리고 있다.

말 무덤의 둘레가 25m 높이가 5m로 기록과 의병들의 무덤 흔적이 남아 있지만 세월의 풍파와 도굴꾼에 의해 파헤쳐져 지금은 그 자취를 찾기가 어렵다.

개비리길 입구 전망대.
개비리길 입구 전망대.

창나루전망대서 내려다보면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되는 아우라지 지점이 한 폭의 그림으로 등장한다. 그곳엔 옛날 나루터가 있었던 장소였다. 창나루 터인데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의 첫 승리한 곳으로 왜군들의 진출을 지연 시켰던 곳이었다. 또 6·25전쟁 때는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 전선의 격전지이기도 한, 전쟁의 상흔이 묻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개비리’란 ‘물가’를 뜻하는 ‘개’와 강가나 바닷가의 ‘벼랑’을 뜻하는 ‘비리’라는 경상도 말이 합쳐서 ‘개비리’라고 불린다. 벼랑이 있는 작은 오솔길로써 별 볼일 없는 길, 벼랑이 있는 좁은 길이라서 개비리라고 불렀다.

개가 다닐 정도로 좁은 벼랑길을 개비리라고 불린다고는 하지만 세속화되면서 스토리텔링이 된 것 같다. 물론 겨울에 눈이 왔을 때 눈이 쌓이지 않은 지역으로 개나 사람들이 따라 다니던 곳이라서 작은 길이 나고 그것이 개비리길이란 추축도 가능해진다.

그런 길을 따라서 청아지, 영아지, 고곡 등지의 많은 사람들이 당시 60, 70년 전만해도 남지 장에 볼일 보러 가려면 먼 길을 둘러야 하는데 이 지름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장날이면 이 길이 복잡할 정도였다고 이곳 벼랑길 모롱이에 외딴집에 살았던 이병두(89) 씨는 회고 했다. 서울로 가려면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해야 했기에 ‘서울나들이 길’이라고도 했다.

남지 개비리 옛길은 낙동강 1300리 가운데 가장 호젓하고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곳이고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아름다운 길이라는 말도 있다.

태곳적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개비리가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찾는 발걸음이 많아지고 있다. 개비리도 옛길 그대로 잘 보존돼야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 믿는다.

창녕에는 5개의 개비리길이 있다고 한다. 이방면 덤말리 개비리길, 등림 개비리길, 유어면 이이목 개비리길, 남지 개비리길, 부곡면 임해진 개비리길이 그것이다. 임해진 개비리길 인근 노리마을에는 이야기에 전해지는 개의 기념 비석도 새겨져 있다. 남지 개비리 길 주변엔 우포늪, 곽재우장군 생가마을 탐방 등 많은 유적지도 산재해 있다. 추봉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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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비리 전설
-정노천 시인

창나루 건너 억새밭 두고
바람아 네 꼬리 어디에 감췄나
마분산 허리 깎아지른 절벽에
매달린 마삭줄 끊으러 갔느냐
물결 쪼개서 뛰어다니던 햇살아
은비늘 훔쳐서 어디로 숨겼나
반짝이는 댓잎파리 노랫소리
회락재 찾아갔느냐
안개야 강안개야 뉘 새벽꿈으로 갔느냐
옹달샘 떠서 비손하는 옥관자바위
층층나무 씻으러 갔느냐
아슬아슬 짜릿짜릿
비리 비리 개비리에 다 모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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