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 윤봉길 의사가 했다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 윤봉길 의사가 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4.25 18:5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ㆍ경남국학원 이사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천장절(天長節)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한 날이 밝았다. 이미 공원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의 한 열사는 내외 귀빈들이 보는 가운데 무력을 시위를 사열하는 단상에 수류탄을 던져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는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츠(重光葵) 에게 중상을 입혔다.


일본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로 8월 15일 항복을 했다. 그리고 다음달 9월 2일 요코하마에 정박 중인 미주리 전함 위에서 2차 세계대전의 완전한 종식을 뜻하는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됐는데 그때 한쪽 다리를 절며 지팡이를 짚고 일본 측 대표로 나와서 사인을 한 사람이 A급 전범으로 실형까지 받은 일본외무상 ‘시게미츠’ 전권대사였다.

의사는 사형 당할 때 죄인으로서 천황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일제는 윤봉길 의사를 짧은 십자가형틀에 묶고 형틀을 땅에 박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릎을 꿇게 한 뒤 총살형으로 순국하게 되었는데,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해 하고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세계만방에 대한의 독립의지가 굳건히 살아 용솟음 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의사는 거사를 앞두고 두 아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는데, 현재를 사는 우리의 부모들에게 어떤 어버이가 되어야 하는지를 가슴을 뜨끔하게 하는 명언으로 우리 모두 고이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비인도적인 만행에 격분하여 보통학교를 자진 퇴학하고 민족의 한학교육에만 전념하였다.
1926년부터는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야학당을 차리고 문맹타파를 통하여 국문·역사·산술·농업지식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30년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유서를 써 놓고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상해에서 낮에는 공장 생활을 하고, 저녁에는 영어 학교에 다니며 때를 기다리던 중 1932년 백범 김구 선생을 비밀리에 접촉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평생의 꿈이었던 홍구공원의 의거를 거행하게 된다.

의사는 의거 3일전인 1932년 4월 26일 백범과의 거사 준비가 완료되자 거류민단 사무실에 가서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거행하고 태극기 앞에서 폭탄과 권총을 들고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으로 된 선서문을 가슴에 품고 백범 주재 하에 비장한 결의를 되새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곽해일 2013-04-29 14:07:40
지금 윤봉길 의사 얘기를 들으니, 격세지감이다 불과 8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그 사건을 지식으로라도 기억을 하고 있을까? 그분들이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삶을 불살랐는데, 지금 우리는 그분들 보다 조금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간다. 학력은 그당시보다 뛰어나다 그런데 민족혼 교육과 그 결과 민족을 향한 충정은 어느정도 가슴에 품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