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3)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3)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01 10:2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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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3)



▶부자(父子)간 영국수상을 지낸 대(大)피트와 소(小)피트:대(大)피트는 윌리엄 피트(1708~1778·70세·10대)이고 소(小)피트는 둘째 아들(1759~1806·47세·16,18대)인데 최연소(24세) 수상을 역임했다. 대(大)피트였던 아버지는 상원에서 식민지의 유화정책(宥和政策)에 대한 신랄한 비난 연설 도중에 쓰러진 후 병세가 악화되어 일어나지 못하고 “가라, 너의 조국이 너를 부르고 있다. 조국으로 하여금 너의 전부를 독점케 하라. 이제 곧 쓸모없어지는 이 늙은 것 보고 눈물을 짜고 있을 게 아니라, 한순간도 게을리하지 말고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과연 대인(大人)다운 유언이었으며 아들을 수상으로 키웠으니 성공한 인생이었다.

소(小)피트인 아들은 생을 마감할 때 “지도를 치우게. 앞으로 10년 동안은 필요 없을 거야”라고 탄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유럽 전체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손아귀에 들어갈 테니, 굳이 지도로 국경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라고 해석된다. 영국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이기고, 로스차일드 가문이 대불동맹 각국에 사실상 무기한으로 빌려준 막대한 자금 지원을 끼고도 대륙의 판세가 한방에 나폴레옹에게 넘어갔으니 충격을 안 받는 것이 더 이상하다. 한때 해 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라 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에도 대(大)피트(박정희)와 소(小)피트(딸 박근혜)가 탄생하여 2023년에는 세계 강국 6위에 올랐으니 이제는 우리 대한민국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 대단하지 않은가! 자부심과 긍지를 갖자.

▶히틀러가 가장 존경한 ‘계몽군주’프리드리히 2세:1712~1786·74세, 재위:1740~1786·46년):그는 히틀러가 가장 존경한 ‘계몽군주’였다. 프로이센(Preussen)의 국왕에 오르자마자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유럽을 전쟁 참화(慘禍)속으로 몰아넣었다. 이 전쟁은 유럽서 벌어진 7년 전쟁(1756~1763)으로 인류 최초의 세계전쟁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와 주변 강국에 맞선 외교 전략과 전쟁을 통해 프로이센의 영토를 확장하고 유럽 최강의 군사 대국으로 만든 특출한 군사 전략가였으며 나아가 저서를 30권 썼으며 시와 음악에 유능한 작가이자 작곡가로서 100곡이 넘는 소나타를 작곡했다. 그는 일생 동안 여인을 멀리했으며 남자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리고 고문(拷問)제도를 폐하기도 했다. 그는 ‘이성과 철학이 명령하는 변화와 개혁을 수행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렇지만 그의 말과 실제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예컨대 그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해 ‘세상 모든 책 가운데 가장 위험한 책 중 하나’라고 비난했고, ‘인간의 피를 흘리는 것만큼 끔찍한 것은 없다’며 전쟁을 혐오하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다. 그렇지만 왕으로 등극한 첫해 제일 먼저 한 일은 법과 도덕을 깡그리 무시하고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전쟁을 건 일이다.

이로 인하여 유럽 강국들뿐 아니라 식민지까지 휘말리게 된 이 전쟁은 사실상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도 하는데,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거의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다. 다시 힘을 회복한 후에는 이전의 적국인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함께 1차 폴란드 분할을 기도하여 상당한 영토를 늘렸다. 그는 반(反)마키아벨리 철학을 견지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확실한 마키아벨리주의자였다. 그는 ‘성향으로는 철학자였지만 직업으로는 통치자’라고 스스로 말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아왔고 철학자로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유서를 남겼으며, 마지막 숨을 거둘 때는“산을 넘었구나. 이젠 잘 될 거야!”라는 유언도 남겼다. 이 사람을 보면 인간이란 철학보다도 욕망이나 권력이 더 지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죽음을 초월한 소크라테스가 더욱더 성인이라는 감동으로 되새겨지게 된다.

46년의 통치 끝에 그가 죽었을 때 국민 대부분의 반응은 차라리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철학자 에른스트 아른트는 ‘그 어떤 군주도 그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혹평했다. 히틀러가 자기 벙커에 유일하게 걸어놓은 초상화의 주인공이 프리드리히였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계몽’과 ‘전제군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이 두 개념을 붙여놓은 ‘계몽전제군주’는 ‘비오는 달밤’·‘부드러운 폭력’·‘민주 파쇼’처럼 모순어법이라 할 수 있다. 1701년에 프로이센 왕국이 세워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 및 폴란드에 점령되었으며 이름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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