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행복한 겨울
세상사는 이야기-행복한 겨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07 13:1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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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동/수필가
김창동/수필가-행복한 겨울

날씨가 맵다. 몹시 춥다. 한파다. 전국이 폭설에 묻히고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친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린다는 말이 떠오른다. 내게 겨울은 어떻게 시작되었던가. 어린 시절 추수가 끝난 늦가을의 썰렁한 빈 벌판이 먼저 떠오른다. 빈 벌판처럼 냉가슴을 울리는 바람 소리. 하늘도 창백해지고 더 멀어진 느낌이었다. 길섶 마른 풀들 사이엔 맥없이 주저앉아버린 가냘픈 그림자들만이 어른거렸다. 필자가 살던 저 멀리 두메산골 가자골 광산도 힘겨운 침묵 속에, 마치 다른 세상을 향해 돌아앉은 모습이었다. 그때 어린 눈에 산은 거대한 어둠에 가까웠다. 해 질 무렵 서쪽 하늘은 야릇한 그리움이나 신비감을 불러일으켰으나 칼칼한 바람과 함께 어둠이 다가오면 좀 무섭다는 느낌도 주었다.

하나 때가 때인지라 그즈음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횃불을 들고 하천에 나갔다. 참게를 잡기 위해서였다. 형과 함께 나도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나는 희미한 불빛 아래 게걸음치는 참게를 처음 보고는 흠칫 놀랐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저기 부대 자루 속에 담겨 있던 참게들은 물거품을 흘리며 가갸거겨, 가갸거겨를 연신 읊어댔다. 추운 밤 고사리 같은 언 손을 비벼가며 새로운 탐구심에 나는 즐겁기만 했다. 창공에 보석처럼 수놓아진 무수한 별로 인해, 적막함은 그 풍요로운 기운으로 인해 그리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 후 얼마 안 지나 차갑고 매운 바람이 불었고, 두꺼운 옷을 껴입어야 했다. 이른 아침 방안에선 흙벽에 몸을 뒤척이는 시래기들의 부스럭대는 소리에 무연히 귀 기울이다 다시 잠이 들기도 했다.

농한기의 겨울, 농사일을 다 내려놓은 어머니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가족 먹을거리 챙겨주는 일로 꽤나 분주했고 부엌에서 무럭무럭 올라오는 따뜻하고, 뿌연 김만큼이나 보람도 느꼈을 거였다. 고구마로 끓어낸 빼때기죽과 조청에 찍어 먹던 가래떡은 왜 그리 맛이 있던지, 밖에서 놀다 쓸쓸해지면 더 추웠다. 방에 들어와 군불을 지핀 뜨뜻한 온돌방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밖의 거친 자연이 있지만 솜이불 속은 아늑한 어머니 품 같기만 했다. 그 겨울엔 왜 그리 자주 출출했던가. 군고구마에 살얼음이 둥둥 떠 있는 동치미며, 식혜의 달달하면서도 시원한 그 맛. 그것은 정신도 번쩍 들게 하는 자연산 청량제였다. 호롱불 아래 바느질하던 어머니 곁에서 하염없이 타오르는 그 불을 바라보며 나는 그때 이름도 모르는 무슨 공덕심 같은 것을 한량없이 지켜보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린 시절 겨울의 추억이 아스라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나는 유장하게 흐르는 해반천에서 신어산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다. 저 멀리 헐벗은 나무들은 의연한 자세로 산등성이 따라 가지런히 서서 묵언 정진 중이다. 겨울이 되니 산의 모습은 그 윤곽이 뚜렷해져 이 투명한 기운이 나는 더 없이 좋다. 먼 산의 빛깔은 옅은 회갈색에 습기 머금은 연보랏빛이 잘 어울려 그 단조롭고 소쇄한 추상미가 오히려 그윽한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주변에 새 소리도 떠나고, 물소리도 떠나 고요하기만 하다. 햇살은 깊은 고요에 머물고 있다. 햇살 아래 크고 작은 돌들, 그 존재의 단순함이 더욱 명료해 보인다. 아우성치던 생명력에서 물러난 마른 잡초들, 차분히 쟁여져 있는 오그라든 낙엽들. 헐렁한 가운데 마른 그 그리움의 모습들이 싫지가 않다.

은은한 어느 절에선가 범종 소리가 울려온다. 행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지난날 행복해지기를 바라던 그 마음 모두 어리석은 마음이었다. 행복이란 초대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오는 무엇, 수용, 관용,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과 다름 아닐 것이다. 모든 관념을 내려놓은 듯 벌거벗은 저 나무들. 무수한 군중 속에 각자 외롭게 서 있어도 모두 깨끗한 행복에 젖어 있다. 차가워진 바람까지 더해져서 몸을 잔뜩 움츠리게 되는 계절. 부디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행복한 겨울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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