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과 남해 충렬사
이순신 장군과 남해 충렬사
  • 김봉철 기자
  • 승인 2013.05.02 1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경화/향토사학자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소재한 충렬사는 추증 영의정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을 모신 사당으로 1973년 6월에 사적 233호로 지정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실제로 전사한 곳은 남해읍 방향 약 2km 지점 이락사 앞 바다 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으나 이순신이 전사해 충남 아산으로 이장할 때 까지 묻혀 있었기 때문에 중요성이 있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서울 인현동에서 태어났고 서해 유성룡과 한마을에서 소년시절을 함께 지냈다고 전해 온다.
그 후 충청도 아산에 이주해 사는데 그곳에서 중요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
보성군수를 역임한 부호 방진을 만나고 그의 딸과 혼인해 살면서 장인 겸 스승이 되어 문과수업에서 병과수업으로 방향을 돌려 궁술과 검술을 배우게 된다.

나중에 전라도 감사 이광은 방진의 사위임을 알고 군관으로 발탁하고 조방장과 선전관으로 기용했다.
남해 충렬사는 통제사 한분이 충렬사를 창건했고 선조 때 사액을 내리고 우암 송시열 선생이 글을 지어 비를 세웠다. 그러나 구한말 때 동학의거 의병전쟁 한일합방 등을 거치면서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아무도 충렬사를 돌보는 사람도 없이 사당은 퇴락하고 잔해조차 없이 터만 남아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의 눈치 살피기에 바빠 더욱 피폐해 지고 말았다.
이에 진주와 하동에 사는 부호 70여 명이 용기를 내고 뜻을 모아 충렬사를 중건하기로 했다.

이 때 마침 통영소재 충렬사를 중건하기 위해 당시 2만원 성금을 모아 일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진주. 하동지역 부호들도 후원회를 조직해 노량현지를 답사하고 중건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현재 남해 충렬사 입구 현판아래 작은 글씨로 1932년 봄 3월에 조직된 진주와 하동 후원회원 70여명의 명단과 중건기가 새겨져 있다.

70여 명의 명단과 1920년 전후 진주여고 진주고 설립 발기인 명단과 일치하는 분들이 많다.
허만정 김기태 박재표 박재화 이풍구 정태석 정태범 서상필 박규석 박재호 정희협 구연승 서진욱 강위수 황의호 정재화 조용하 그리고 하동출신은 이은우 이도식 정재완 정종화 이승한 여종엽 정종석 이진우 등이다.

옛날 부자들은 오늘날의 부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즉시 느낄 수 있다. 재물과 돈을 개인의 소유로만 생각하지 않았고 잠시 맡았다가 돌려줄 것으로 여긴 것이리라. 언젠가 사회로 환원해야 옳은 것으로 여긴 것이다.

서해여룡동(誓海魚龍動)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이순신 장군이 짓고 일제 때 김구 선생이 쓴 글씨가 발견된 적이 있는데 바다에 서원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을 두고 맹세하니 산천초목이 알더라 라는 뜻이다.
충렬사 중건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많은 선비들이 호응하니 비로소 추모의 길을 올리게 되었다. 이제 모여서 이름을 새기게 하니 충의를 생각하는 뜻이 이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되었다. 이 또한 충의를 위한 것이 아닌가 하여 기록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