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민란과 무신정권
진주성-진주민란과 무신정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17 12:3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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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진주민란과 무신정권

고려 중기인 1126년(인종대왕 4년) 2월 이자겸이 갖가지 행패를 부려다가 척준경과 함께 역적이 되어 왕을 감금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척준경이 왕의 밀지를 받고 이자겸을 생포했다.

1128년 진주, 남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관군이 파견되어 진압해 820여 명을 채포하여 합천과 의령 등지에 천민 마을을 설치해 안치했으나 절반은 도주했다. 인종 대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친위 군대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이의방, 이의민 등이 등장한다.

1146년 인종이 서거하고 아들 의종이 즉위하자 김부식 등이 측근이 죽자 환관 정성이 합문지후가 되었을 때 무신을 홀대하는 일 때문에 1170년 정중부의 훈계로 이의방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이고 무신정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1186년(명종) 진주목이 경상 중심에 속했으나 부패가 심하여 진주 수령 김광윤이 재물을 거두어 민심이 나빠 정부에서 잡아 귀양을 보냈다. 신종 3년 진주 향리들의 부패가 심하자 진주 공노비와 사노비들이 떨쳐 일어나 관리 집 50여 채를 불태우고 정방의 집도 불타고 말았다.

정방의 난을 진압할 때 사록 전수룡이 다시 진압하고 태수 이순종이 정방의를 잡아 옥에 가두게 된다. 동생 정창대가 형을 구출해 관련자 6400명을 죽이고 이순종이 억지로 태수가 되었다. 조정에서 안찰부사 손공계가 파견되어 사실을 조사하자 죄가 없는 이순종이 억지로 귀양갔다.

소부감 조통과 중랑장 이당적을 보내 진주를 안무케 했으나 정방의는 굴복하지 않고 병력을 증강했다. 합천사람 광명 등이 20여 명을 거느리고 정방의를 공격하다 죽었다.

1201년 정방의의 폭정이 심하자 진주 백성들이 떨쳐 일어나 정방의 등을 쳐서 죽이고 동생 정창대는 진주성에서 항전하다 도주했다.

1196년(명종) 우봉 최씨 최충헌이 천민 이의민과 두경승을 죽이고 최씨 정권이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 최우는 유학자 우대 정책을 펼쳐 인심을 얻었으나 손자 최의 등이 실정함으로써 대사성 유경, 낭장 김준 등이 왕정 복구를 위해 나서니 62년만의 최씨 정권이 끝나게 했다.

1259년 고종 대왕이 죽고 원종 대왕이 즉위했으니 1260년 몽고에 의해 지배되고 삼별초 난이 발생했다.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진도와 제주도에서 항몽했으나 1273년 배중손이 전사하자 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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