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8)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8)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29 13:2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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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8)

▶페루의 2대 대통령과 볼리비아의 6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나 암살자의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이 알칼라(1795~1830·35세):19세 때인 1814년 에스파냐에 대항한 아메리카 독립 전쟁에 뛰어들었는데 그는 뛰어난 장군임을 입증하였으며, 23세 때인 1818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고, 1821년에 26세의 나이로 준장에 올라 군대 장군 가운데 젊은 축에 들었다. 보야카 전투 이후 대통령 볼리바르의 참모가 되었다.

1821년 볼리바르는 알칼라에게 키토를 해방하는 작전을 맡겨 이듬해인 1822년 5월 24일에 피친차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페루에서 1824년 8월 6일 후닌 전투에서 에스파냐 군대를 물리쳤다. 12월 9일에는 아야쿠초에서 에스파냐 군대의 대부분과 부왕을 비롯한 지휘부를 생포하였다. 이 승리로 볼리비아를 세우면서 에스파냐 치하의 남아메리카 독립 투쟁이 종결되었다. 그는 공적에 대한 보답으로 29세의 나이에 "아야쿠초의 대원수"란 명예 칭호를 받았다.

31세 때인 1826년 볼리비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33세 때인 1828년 볼리바르와 그의 지지자, 그리고 볼리비아를 위해 그가 쓴 헌법에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사임하고 아내의 고향 도시인 키토로 떠났다. 1828년 말 볼리바르의 요청으로 콜롬비아 의회는 그를 의장으로 지명하였다. 이들은 향후 볼리바르의 후계자로 수크레를 공화국 대통령으로 지명하고자 하였으나, 수크레가 거부할 것 같아서 실행하지 않았다. 수크레는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가 이끄는 한 위원회 위원으로 지명되어 1829년에 지방정부 사이에 퍼진 정치적 분리주의를 가라앉히고자 베네수엘라를 순방하였다. 이는 어려운 과업이었고, 수크레는 계속 콜롬비아의 정치적 환경에 불만을 느꼈다.

1830년 초 수크레는 볼리바르가 사임하고 나라를 떠날 뜻을 품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자신도 사인(私人)으로 돌아가고자 키토로 가기로 하였으나, 1830년 6월 4일에 콜롬비아 남부의 파스토 인근인 시에라 데 베루에스코스에서 숨어있던 암살자의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하면서 “빌어먹을, 총에 맞았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참으로 담백한 유언이 아닌가! 한다.

수크레의 암살에 대한 자세한 정황은 확실하지 않으며, 그 원인을 놓고 설도 무성했다. 현재 콜롬비아의 수크레 주와 수크레 시는 그의 이름에서 나온 지명이다. 과거 에콰도르의 통화도 수크레였으며, 그가 태어났던 베네수엘라의 쿠마나 주는 수크레 주로 개칭하였다. 카라카스의 인근 대도시 한 곳도 수크레란 이름이 붙었다. 유해는 키토 성당에 묻혔다. 권력에 초연한 담백한 유언이 자꾸만 여운으로 남는다.

▶15일만 왕의 노릇밖에 못한 나폴레옹 2세(1811~1832·21세):프랑스 제1제정의 마지막 황제(재위:1815.6.22.~1815.7.15·재위기간 15일)이다. 그는 아마도 왕이기 전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아들이었다. 21세의 한창 젊은 나이 때 폐질환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어머니를 불러 주오, 어머니를 불러주오. 저 테이블을 내어가 버려. 난 이제 아무 것도 필요 없어… 저 약도.”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는 한 나라의 왕이기에 앞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들이었다.

▶미국의 대통령 중에서 가장 짧은 한 달만 재임했던 제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1773~1841·68세. 재임:1841.3.4∼4.4·1개월):52세 때인 1825년 상원에 진출한 해리슨은 임기 후 은퇴하여 10년 동안 정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1836년 대통령 선거에서 휘그당 대통령 후보로 나가 낙선했지만, 67세 때인 1840년 선거 때 당시로서는 최고령으로 당선되었다. 취임 3주 후 우산 없이 거리를 거닐다가 비를 맞아 감기에 걸렸는데 그것이 급성폐렴으로 악화되어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난 타일러 씨가 정부의 깊은 원리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그 원리가 순탄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권력에의 집착을 버리고 죽음을 순리로 받아 들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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