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최초 투쟁 유계춘, 의병장 유명국
진주성-최초 투쟁 유계춘, 의병장 유명국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31 11:0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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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최초 투쟁 유계춘, 의병장 유명국

“내가 당장 개를 잡아서 맹세하고자 하니 여러분들도 각기 입술에 피를 바르고 맹소하겠소” 라고 물었고 약속했다. 진주 농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진주 수곡장터에서 열린 군중 집회에서 유계춘(柳繼春) 선생은 소극적이고 나약한 이들에게 말했다. 이 말은 유계춘 선생의 강경, 소신의 혁명가의 모습들이 엿보게 하는 일이다.

양반 출신 유계춘 선생이 1862년 진주 농민항쟁 즉 ‘진주민란’으로 알려져 왔지만 ‘농민 권리청원 항쟁’으로 쓰는 게 바른 말이다. 이때 선봉장이 되어 반봉건투쟁에 앞장섰던 것은 탐관오리의 학정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개혁이었고 조선시대 최초의 민중 권리항쟁이 되었다.

농민은 이 세상의 근본이다. 그러나 혹심한 가뭄과 홍수 그리고 포악한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로 농민의 생활상은 고통과 억압의 역사였다. 이러한 농민의 역사에는 투쟁의 횃불을 밝힌 1862년 2월 진주 농민항쟁이 있었고, 양반을 포기한 농민 유계춘 선생이 시작했다.

유계춘(1818년~1862년) 선생은 진주 수곡면 출신이었다. 그는 문화 유 씨로서 남명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조계 유종지(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옥사 당한 선비)의 9세손이었다. 그런 관계로 조선 후기의 봉건적인 착취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농민항쟁을 주도할 때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남명 조식 선생의 실천적인 학풍을 계승하게 된다.

유계춘 선생도 양반 가문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토지가 거의 없는 빈한한 처지였다. 소작농 부친 유지덕도 일찍 죽는 바람에 홀어머니 진양 정씨 밑에서 빈궁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이처럼 봉건적인 수탈구조에 맞서 싸운 분들은 민란을 주동한 1급 죄인 유계춘, 이귀재, 김수만이 남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그 왜곡된 역사에서 유계춘 선생은 겨우 90년대 중반 무렵 묘지에 상석이 설치되고, 그의 생가터가 조성되고 또 수곡장터 창촌리에 주동자를 위한 농민항쟁 기념탑과 성명이 모두 새겨졌다.(2012년 6월)

그 정신을 계승한 직계 유명국(柳明國) 1869~1937년 의병장은 진주, 하동, 산청 지역민 4백여 명을 모아 일군과 교전하다 부하 16명이 전사하고 1908년 4월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이 언도되었고 필자가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도록 해 드렸다. 손자 유재춘(전 면장)이다.
하동 옥종면 운동장에 147명의 의병들의 공적 추모탑비를 건립(2015년)할 때 추진위원장 양일석(전 도의원), 정재상(사학자) 필자 추경화 등이 군비 7천만 원을 지원(윤상기 군수)받아 건립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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