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시인
부엌 아궁이 앞 빨간 고무 대야에
팔다리 구기고 들어앉아 물장구치던 날
저린 다리 좀 펴려다
발길질이라도 하면
사정없이 날아오는 언니의 매운 복수
등짝에 빨간 손바닥 도장이 찍혔지
어느새 절반이 넘쳐버린 고무 대야
부엌문 열고 들어오시는 어머니 손에는
빨랫방망이가 들려 있었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동구 밖 탱자나무 울타리 돌아
굴뚝 연기는 놀리기라도 하듯 춤을 추고
서산 넘어가던 정월 해 요란한 구경거리에
가던 길 멈추고 온 동네 벌겋게 만들었지
<작가 노트>
기억에도 향기가 있다면, 그날의 향기는 어떤 향이었을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요즘 아이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과연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지도 궁금하다. 그 시절에는 더 추웠다. 지금처럼 가볍고 따뜻한 방한복도 없었고 어디든 들어가면 훈훈한 난방 기계도 없었지만, 돌아보면 마음만은 지금보다 더 따스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명절을 앞두고 행사처럼 치뤄졌던 목욕하던 날, 등짝에 손바닥 도장을 찍은 언니도, 언니에게 대든다고 나만 혼내셨던 엄마가 미워 도망치면서 눈물을 찔끔거렸지만,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언니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고소한 밥 냄새가 온 동네를 감쌌다. 바로 내가 기억하는 그날의 향기다.
박정은/시인 경남문협 회원
* 경남 산청 출생
* 2020년 ‘새한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 2023년 경남 문협 시조 부문 신인상 수상
* 시집 ‘기억에도 향기가 있을까’, 공저로 여백 외 다수
* 경남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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