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비빔밥과 전주비빔밥의 역사, 그 실패와 성공(1)
진주비빔밥과 전주비빔밥의 역사, 그 실패와 성공(1)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2.12 13:4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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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강/간호사, 시인
최희강/간호사, 시인-진주비빔밥과 전주비빔밥의 역사, 그 실패와 성공(1)

20년 전쯤의 밤이 깊어갈 무렵이다. 간호사라는 내 직업의 특성상 오후 근무는 밤 9시가 넘어야 야간 근무자와 교대하고 퇴근한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분위기 전환을 위해 노래부터 틀어 놓는데, 즐겨듣는 ‘정다운 가곡'이라는 라디오 프로가 있었다.

그날따라 재미있는 곡을 접하게 되었는데 ’진주비빔밥‘이라는 독특한 가곡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김호준 교수가 작곡하고 바리톤 문병인 교수가 부른다기에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이런 재미있는 비빔밥에 대한 가곡이 있구나”하고 다음에 다시 들어봐야 되겠다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런 기회는 그 후 없었다.

2006년 나는 시인이 되었고, 그해 6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 홀에서 한국서정시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영광스럽게도 나의 신인상 시상식도 있었다. 이날 사회자는 진주 출신의 이어산(본명 이순갑) 시인이었는데 나중에 뒤풀이 장소에서 서로 인사 겸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분이 바로 가곡 ’진주비빔밥‘을 작시한 장본인이었다. 그를 통해 가곡 ’진주비빔밥‘ 원문을 받을 수 있었다.

“사골국에 밥을 짓고/ 밥 위에 멋을 얹어/ 오행 오색 맛을 얹어/
달그락 달그락 꽃으로 피어난다/ 진주비빔밥이여~/
시금치 미나리 호박 오이/ 은행 육회 고추장 대추/ 황란 황포묵 호두 잣/
죽순 도라지 숙주 무/ 천년의 맛이 고향처럼 안겨 오는/ 에헤, 칠보화반이여~/
육회 위에 잣을 얹고/ 열두 가지 나물에다/ 채소 육류 조화되어/ 송연히 피어난 / 석류꽃 아름답다/ 진주비빔밥이여/ 칠보화반이여~”

빠르고 강렬하다가 물 흐르듯 이어지는 가사에는 진주비빔밥의 원형을 그대로 보관한 역사의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골국에 밥을 짓는다’라는 첫 소절은 충격이었고, 나물이 12가지,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 육회, 그리고 진주 시화인 석류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난 ’칠보화반‘이라니 간단한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비빔밥이 아니어서 관심을 더욱 갖게 되었다. “언젠가는 진주에 가서 제대로 된 진주비빔밥을 먹어보고야 말리라” 다짐했다.

나는 24년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물 좋고, 공기 좋고, 살기 좋다는 선배 시인의 말이 떠올라 무조건 진주로 2년 전에 이사 왔다. 과연 진주는 내가 꿈꾸던 살기 좋은 도시였다. 1년 동안 진주를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 걸어서 다녔다. 당연히 진주비빔밥 집을 찾기도 했다. 몇 군데 유명한 식당에서 만난 진주비빔밥은 내가 꿈꿔왔던 것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래전 진주시청 홈페이지에서 메모해뒀던 진주비빔밥 설명이다. “진주비빔밥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쌀에 사골국을 부어 기름진 밥을 짓고, 그 위에 오색 나물과 고명을 화려하게 얹어 보탕국, 선지국과 함께 먹었던 음식으로, 예로부터 꽃밥, 화반 또는 칠보화반(七寶花飯)이라 불렀다. 문헌에 의하면 삼국시대에는 진주지방에 효채(淆菜)밥, 지금의 비빔밥이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는 궁중에서 즐겨 먹던 음식 중 하나였으며, 특히 태종 때에는 한양의 정승들이 진주비빔밥을 먹으러 진주에 자주 왔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내가 가본 어느 식당도 그 역사성이 제대로 설명된 곳은 없었고 식재료가 많이 생략된 비빔밥이었다. 전통 진주비빔밥을 제대로 맛볼 곳은 없었다. 세계에 퍼지고 있는 한류 중에서 요즘 K-Food의 대표 음식으로 비빔밥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데, 거기에서 진주비빔밥의 역사성, 질과 멋에서 비교도 되지 않을 전주비빔밥이 그 자리를 꿰찰 듯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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