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 미천 3·1운동 김윤권 투사
진주성-진주 미천 3·1운동 김윤권 투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2.14 13:2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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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진주 미천 3·1운동 김윤권 투사

경남 진주시 미천면 3·운동 지도자 김윤권(金潤權)투사는 진주(진양)시 미천면에 사는 곽복금, 김윤권(1876~1944) 박봉제, 노기주, 임인포, 정준길, 이화서 등 11명이 진주시내 3·1운동을 직접 목도하고 귀향하자 하고 동매마을(미천초등학교 인근)에 모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박봉제 선생은 격문을 작성해 배포하고 대한독립이란 깃발을 만들어 7백여 명을 모아 군중을 모아 시위를 전개했다. 놀란 일경이 출동하자 시위 군중은 동서로 흩어지고 박봉제, 곽복금, 등은 의령지역으로 피신했으나 김윤권 선생은 자택에 숨어 있다가 그날 밤 피체 되었다. 일경의 엄중한 조사와 혹독한 고문이 자행되었으나 주동자 이름을 실토하지 않았다. 1919년 6월 4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이 언도되어 옥고를 치렀다.

미천초등학교 앞에 가보면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는 모양의 만세비가 보이는데 이 같은 시골에서도 나라를 구하겠다고 700여 명이 시위를 전개했다는 사실에 감동 감화를 받는다. 92년 8월 김윤권 선생의 공적서, 신청서, 평생 이력서 등을 필자가 직접 조사, 작성해 제출한 결과 93년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에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도록 해 드렸다. 김윤권 선생의 공적비는 97년 4월 5일 건립했는데 제막식 하는 날 필자가 김씨 종친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동네 입구에 공적비를 세우자고 말했으나 묘비가 되고 말았다. 93년 4월 13일 대통령 표창이 추서된 과정은 김윤권 선생의 손자 김정규 선생이 남해중학교 교사에서 진주고 체육 교사로 옮기자 필자와 2명이 미천면사무소 ‘범죄인 명부’를 찾아보니 한 달 전에 경남도청으로 이관했다는 말을 듣고 도청에 가보니 지하 창고에 가득한 문서에서 2시간 동안 찾아 헤매다 ‘범죄인 명부’ 문서를 찾게 되었다. 노기주 선생의 옥고 기록은 함께 찾았으나 다른 분들의 옥고 기록은 찾지 못했다. 진주시 미천면에서도 민족과 나라를 위해 투쟁한 실체가 밝혀져 반가움이 더하였다. 미천면 정성 마을에 직계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공동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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