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얼굴 없는 모자
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얼굴 없는 모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2.18 13:1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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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담/시인
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얼굴 없는 모자

나는
벗어두는 얼굴이 많다
접고 포개놓는 모자 속에
모르는 내 얼굴이 많다
정동진 파도 눈썹 위로 밀려오던 날
철로 위로 굴러가는 솔잎과 모자
모래를 털고 솔잎 떼어내고
모자 속에 손을 넣고 역사 한 바퀴 빙 둘러보고
건네는 내 모자
해안선 따라가는 수평선과 모래와 바람
벤치 앞 출렁이는 바닷물을 두고
철길은 프레임을 벗어나고 있다
나는
얼굴 없는 모자
빈 모자
한 번씩 써보고 벗어두는 모자
나는
쓰지 않는 모자
(조향옥 ‘모자’)

봄이 오면 바다향이 물씬 나는 도다리쑥국이 생각난다. 기차역이 있는 ‘정동진’ 바닷가는 수채화적 색감의 노을이 기다리고 있어 좋다. 오늘은 조향옥 시인의 ‘모자’를 소개한다. 조향옥 시인은 2011년 계간 ‘시와 경계’로 등단했다. 일상에서 모자를 바꾸는 것은 새로운 역할이나 상황으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때에 따라 다른 모자를 착용하여 내면의 변화와 성장을 경험하고, 새로운 모험을 준비한다.

시적 화자는 어느 날, 집 한구석에 포개져 있는 자기 모자를 보고 사색에 잠긴다. 자주 쓰는 모자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 없는 모자를 본다. “나는/ 벗어두는 얼굴이 많다” 여기서 ‘모자’는 상징이다. 훈련병, 경찰관, 운동선수, 등산객 등 쓰는 이에 따라 상징하는 게 다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화하는 감정 따라 ‘나’의 얼굴이 많다. 때론 모자가 모자를 쓰고 있을 때 있고, 모자는 가면과 같을 때 있다.

내 얼굴을 숨기고 웅크려 있는 내 모자들은 오욕칠정에 떨었고, 감춘 가면을 쓰고 있다. 오래 신은 구두를 보면 주인의 얼굴을 닮는다는 소리가 있다. 모자 역시 그렇다. 모자가 점점 다른 형태로 변해갔다. “정동진 파도 눈썹 위로 밀려오던 날” 바다의 고독 속으로 ‘나’는 자기 감각을 가득 채우며 정동진의 파도와 철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굴 없는 모자” 파도 소리에 화자는 ‘나’는 시인이라는걸, 은유와 상징으로 직조한 얼굴 없는 ‘모자'를 쓰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각기 다른 표정을 하는 모자 중에서 나는 평소 그리워하던 내 얼굴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모자 속에 숨어 있던 내가 나왔다. 나를 찾아 여행하는 것이 시 짓기인 셈이다.
“모자 속에 손을 넣고 역사 한 바퀴 빙 둘러보고” 시대정신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해 본다.

여기서 ‘역사’는 중의적으로 읽힐 수 있겠다. 일상에서 모두가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고, 때로는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 조 시인은 작고 아담한 정동진역을 보며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스스로 묻는다. 파도와 해변을 보고 나는 눈으로 그리고 손으로 느낀다. 노을이 삶을 반추하고 얼추 돌아오던 길이다.

요즘 AI의 등장으로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작업을 자동화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에 탁월하다. 그러나 창의성과 감수성은 아직 인간의 독특한 영역이기에 안도하지만, 두렵기 짝이 없다.

“해안선 따라가는 수평선과 모래와 바람/ 벤치 앞 출렁이는 바닷물을 두고/ 철길은 프레임을 벗어나고 있다” 창의성 증진은 ‘프레임’에 갇히기보다 자유로운 영혼이 필요하다. 조향옥은 시‘수평선’에서 “빨갛게 노을 지는 순간/ 바다의 잔 속으로 기울어지는 향긋한 머릿결 냄새/ 짭짤한 소금기 입안에 달라붙는 순간”이라고 한다. 하나의 감정에 하나의 이미지밖에 붙어 있지 않다. 화자는 수평선을 보고 끈질긴 소문처럼 달리는 기차를 발견한다.

이처럼 시인들은 자신만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감성으로 시를 작성할 수 있어야,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겠다. 시는 시인이 쓰는 게 아니라 언어가 하는 거다. 얼굴을 강타하는 모래알처럼 시 짓기는 언어가 들어갈 수 있는 틈새를 만드는 일이다. 풍경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노을과 함께 자유롭고, 가볍고, 상쾌하게 해변을 거닐고 싶은 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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