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지금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2)
세상사는 이야기-지금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2.19 12:30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창동/수필가
김창동/수필가-지금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2)

물을 찍어 얼굴 여기저기를 닦느라 연신 고개를 흔드는 어린 토끼의 모습, 바람에 잎을 뒤집으며 빈 하늘에 점묘의 붓을 찍은 포플러나무들의 행렬,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의사의 얼굴, 자상하게 병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환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의사의 진지한 눈, 고갯길을 돌아서는데 혼자 피어 있는 상사화, 장식품처럼 잘 다듬어져 있고 귀여운 모습을 지녔으면서도 자랑하지 않고 산속에 조용히 피어 있는 들꽃 한 송이를 우리를 기쁘게 한다.

비 그친 뒤 골짜기를 타고 올라가는 골안개의 아름다운 비행,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느릿느릿 움직이는 비안개를 따라 드러나는 능선이 그리는 아름다운 한 폭의 담채, 오랫동안 보이지 않게 착한 일을 해오다가 우연히 드러나 알게 된 어떤 사람의 선행, 기도 중에 복잡한 많은 상념들이 생기고 가라앉기를 되풀이하다 “감사하며 살아라, 믿으며 살아라, 사랑하게 살아라.” 복잡한 대수방정식이 간단한 공식으로 정리되듯 그렇게 몇 마디 말로 함축되어 가슴에 자리 잡을 때 우리의 마음은 고마움과 기쁨으로 가득 찬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고개 너머 외딴집 자갈길 비틀거리며 내려가는 집배원의 오토바이 소리, 혼자 사는 할머니가 부탁한 약봉지를 전해주러 가는 집배원의 뒷모습. 내가 실수하고 잘못하는 걸 알면서도 말없이 덮어주고 이해해주는 고마운 사람의 눈길, 수십 년의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승리한 사람의 얼굴에 번지는 잔잔한 웃음, 곱게 늙으신 노인의 얼굴, 그가 살아온 삶과 마음가짐이 그대로 배어 드러나는 평온한 얼굴을 대했을 때, 거짓 없는 정직한 목소리와 겸손한 자세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의 사람을 만났을 때, 수련잎 위에 앉아 있는 투명하고 고요한 물방울, 일 때문에 걸려 온 전화인데도 목소리만 들으면 공연히 즐거워지는 반가운 사람의 전화, 편안하게 농담을 해도 기분 좋게 이야기가 오고 가는 사람의 목소리는 우리를 기쁘게 한다.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는 병아리의 고운 발, 그 발로 땅을 밟으며 걸어가는 대견한 몇 발짝의 걸음, 눈 내린 날 새벽 마당에 찍혀 있는 고라니 발자국, 소나기 내리다 그친 숲의 싱그런 초록, 종신서원을 마치고 나오며 활짝 웃는 수녀님의 환한 얼굴, 밤하늘 너른 마당에 바람이 서늘하게 씻어놓은 뒤 별이란 별 모두 나와 왁자한 날, 메밀밭처럼 하얗게 깔린 별들을 바라보면서 깊어가는 가을 밤. 풀벌레들이 연주하는 교향악.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지탱해주고 희망을 주는 것은 바로 그런 조그만 기쁨들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