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누구에게나 지고 싶은 날
세상사는 이야기-누구에게나 지고 싶은 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2.25 13:55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창동/수필가
김창동/수필가-누구에게나 지고 싶은 날

예전에 어느 대학병원에서 전공의들과 간호사들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 그 이유는 간호사가 의사들에게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고 ‘닥터 김’ 등으로 부른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 의사들은 ‘미스 김’ 등으로 불렀는데 그 싸움은 심각하게 오래 끌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몇 년 지내 본 의사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이제는 간호사들과 싸우지 않고 조용히 좀 살고 싶다고 아마도 그 집요한 여인네들의 공격에 견디기 힘들어서 나온 소리이리라.

어느날 문득, 지고 싶은 날이 있다.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고 너무 발버둥 치며 긴장하며 살아왔다. 지는 날도 있어야 한다. 비굴하지 않게 살아야 하지만 너무 지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제 피붙이한테도 지지 않으려고 하며 산다. 지면 좀 어떻는가. 사람 사는 일이 이겼다 졌다 하면서 사는 건데 절대로 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지 오래되었다. 그 강박에서 나를 풀어주고 싶다.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 지고 싶다. 권력이 아니라 음악에 지고 싶다. 돈이 아니라 눈물 나게 아름다운 풍경에 무릎 꿇고 싶다. 선연하게 빛나는 초사흘 달에게 항복하고 싶다. 침엽수 사이로 뜨는 초사흘 달, 그 옆을 따르는 별의 무리에 섞여 나도 달의 부하, 별의 졸병이 되어 따라다니고 싶다. 낫날같이 푸른 달이 시키는 대로 낙엽송 뒤에가 줄 서고 싶다. 거기서 별들을 따라 밤하늘에 달배, 별배를 띄우고 별에 매달려 아주 천천히 떠나는 여행을 따라가고 싶다.

사랑에 압도 당하고 싶다. 눈이 부시는 사랑, 가슴이 벅차서 거기서 정지해버리는 사랑, 그런 사랑에 무릎 꿇고 싶다. 진눈깨비 같은 눈물을 뿌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하는 눈 속에 갇히고 싶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 속에 고립되어 있고 싶다. 나는 그동안 너무 알맞게 익기만을 기다리는 빵이었다. 적당한 온도에서 구워지기만을 기다리는 가마 속의 그릇이었다. 알맞고 적당한 온도에 길들여진 지 오래되었다.

거기서 벗어나는 날이 있어야 한다. 산산조각 깨어지는 날도 있어야 한다. 버림받는 날도 있어야 한다. 수없이 깨지지 않고, 망치에 얻어맞아 버려지지 않고 어떻게 품격 있는 그릇이 된단 말인가. 접시 하나도 한계 온도까지 갔다 오고 나서야 온전한 그릇이 된다. 나는 거기까지 갔을까. 도전하는 마음을 슬그머니 버리고 살아온 건 아닌지. 적당히 얻은 뒤부터는 나를 방어하는 일에만 길들여진 건 아닌지. 자꾸 자기를 합리화하려고만 하고 그럴듯하게 변명하는 기술만 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가난한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가난했기 때문에 정직하고 순수했던 눈빛을 잃지 않아야 한다. 적당한 행복의 품에 갇혀 길들여지면서 그것들을 잃어가고 있다면 껍질을 벗어야 한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곳이 그 의자, 그 안방이 아니었다면 털고 일어서는 날이 있어야 한다. 너무 안전선 밖에만 서 있었다. 너무 정해진 선 안으로만 걸어왔다. 그 안혼함에 길들여진 채 안심하던 내 발걸음, 그 안도하는 표정과 웃음을 버리는 날이 하루쯤은 있어야 한다. 그날 그 자리에 사무치는 음악, 꽁꽁 언 별들이 함께 있으면 좋겠다.

세상만사 모든 것은 결국은 사람이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다. 사람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겠는가. 난 사람이 좋다. 누가 뭐래도 ‘사람 꽃’이 으뜸이다. 물론 내 뒤통수를 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엔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좀 아름답게 지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