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내가 훈장 찾아 준 박재룡 박재수
진주성-내가 훈장 찾아 준 박재룡 박재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2.28 14:0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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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내가 훈장 찾아 준 박재룡, 박재수

경남 진주시 내동면 삼계리에 산 박재룡(朴在龍, 1887~1955) 선생과 박재수(朴在秀, 1895~1929) 선생, 강대창(姜大昌), 김형권(金亨權) 등이 1919년 3월부터 경남유림대회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는데 ‘조선독립창가’, ‘조선독립경포서’, ‘조선독립선언서’ 등을 작성해 경남 일원에 배포하다가 일경에 발각, 체포되었고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혼절하기도 했다. 박재수 선생의 부친은 통정대부 비서감승 벼슬이 제수된 분이고 진사 하재원의 따님과 혼인한 분이다.

박재수 선생의 큰형 박재호씨는 1911년 6월 주민들이 낼 호세 40원을 대납했다고 그 당시 신문에 보도되었고 1921년 11월 진주고, 진주여고 설립 발기인 겸 초대 이사장을 역임한 분이다. 작은형 박재표씨는 진주청년회장, 신간회 진주지회장으로 공을 세우고 진주 시내 계동에 있는 백화점 바로 남쪽에 있었던 축구 운동장을 조성해 청년들의 체력 향상을 위해 무료로 사용케 하신 분이다.

3형제가 모두 민족을 위해 청소년들을 위해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 애족심이 투철하신 분들이라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다. 박재수 선생은 진주 3‧1운동을 목격하고 감동을 받아 유림대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일경의 엄중한 조사를 받고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으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4월 2일 가출옥했다.

박재수 선생의 묘지명은 안동 권씨 권선이 지었다. 금산면 갈전리 진주항일투사 추모비에 필자가 다음과 같이 새겨 모셨다. “유생을 규합해 독립책선문 등의 배포로 6개월 옥고한 박재수” 박재수 선생의 아들 박인석 씨는 필자의 고모부 하기식 님과 함께 부산대학교 교수로 근무했고 차남 박두석 씨도 부산대 교수로 진주고 교가를 지은 분이다.

박재룡 선생은 경남 유림대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격문을 지어 배포하다 일경에 발각, 체포되어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형이 언도되었고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언도되어 대구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박재수, 박재룡 2명의 문헌 기록을 찾아 필자가 공적서, 이력서,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해 박재룡 선생은 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케 해 드리고 박재수 선생은 93년 8월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도록 해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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