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임란(壬亂)전후 조선비록(朝鮮秘錄)(2)
칼럼-임란(壬亂)전후 조선비록(朝鮮秘錄)(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12 14:4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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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강신웅/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임란(壬亂)전후 조선비록(朝鮮秘錄)(2)

‘본 고는 대구자수박물관 정재환관장이 30여 년 전에 백병풍(白屛風)에서 발굴, 소장해온 국내의 희귀 고문헌자료로서, 조선조 인조2년(1624) 일본에 수신사(修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계영(辛啓榮 1577∼1669)이 그 어떤 정사(正史)에서도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당대의 신빙성 있는 역사고사(歷史故事)를 한자(漢子)원문으로 기록된 고문서를 필자가 직접 국역(國譯)한 자료이다.’

[이몽학(李夢鶴), 윤영현(尹英賢), 이시언(李時彦)(2)]
이 전에 조정에서는 훈련대장 조경(趙儆)이 도감(都監)의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적을 맞이하였다. 조공은 본래 겁이 많고 나약한 사람이었다. 이몽학의 세력이 어떠한지를 몰라 조심스럽게 행군을 하는데, 하루에 불과 30리도 가지 못하였다.

3일째 되는 날에야 바야흐로 수원(水原)에 당도하였으니, 그가 겁을 내고 두려워한 것이 이와 같았다. 만약 이몽학의 병사들이 곧장 도성으로 올라갔다면 그들이 궤멸되어 흩어졌을 것이 뻔하다. 조공은 잡혀 와서 시간을 지체하고 머문 죄로 다스려졌다. 청난공신(淸難功臣)을 책봉하는데, 홍가신이 원훈(元勳)이고, 박명현, 신경행, 최호를 합해 네 사람이다.(‘선조실록’에 의하면 실제로는 임득의(林得義)를 포함해서 5명이다.)

이 해(1596년) 정월과 이월 사이에 임진란 초기에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 송상현(宋象賢)의 친족이라고 전해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꿈에 송공이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주었다.

대운(大運)이 다시 와서 남녀가 섬멸되니 大運重來士女殲
병신년의 재앙은 임진년보다 심하리라. 丙申之禍碧於藍
서쪽으로 철옹성에 돌아와도 술이 없어 시름하고 西歸鐵甕愁無酒
동쪽으로 금강으로 달리니 소금이 있어 기뻐하네. 東走金剛喜有塩
임금 수레 요동의 학 꿈에 놀랐지만 翠輦雖驚遼鶴夢
황건적은 끝내 한나라에 짓밟혔네. 黃巾竟滅漢靴炎
다른 해에 혹시 전쟁이 그치거든 他年倘得干戈定
나의 뼈를 거두어 바다 남쪽에 뿌려 주게. 吾骨須收瘴海南

이 시를 사람들이 모두 전하고 얘기하면서, 앞날에 임진년보다 심한 재앙이 있어, 요동(遼東)에서 객지생활을 할 일이 있었지만, 황건적이 멸망하고 전쟁이 끝난다는 말이 있어 기뻐할 만하다고 생각하였지, 어찌 먼저 도성 가까운 곳에서 반역의 적당이 일어나는데, 그 이름이 이 시와 부합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제5구에 ‘요동의 학 꿈[遼鶴夢]’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선도(仙道)를 배워 학이 되어 돌아왔다는 정령위(丁令威)의 고사를 말한 것이지만, 이몽학(李夢鶴)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이다.)

윤영현(尹英賢)과 박음국(朴音國) 두 사람이 다시는 벼슬길에 나갈 생각이 없었는데 광해군 때에 이르러 윤영현은 광해군이 왕자 시절에 사부(師傅)를 지냈었던 것 때문에 특별히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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