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姓氏)의 족보(族譜)와 여자의 성(姓)
성씨(姓氏)의 족보(族譜)와 여자의 성(姓)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6.1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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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신라문화보존회 경상남도지부장

 
단일민족의 뚜렷한 전통을 이어온 한국인은 엄격한 성씨(姓氏)관념과 이를 표현한 족보의 발달을 통하여 스스로의 뿌리를 찾아 후손에 연결시키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나라의 성씨 족보를 보면 기자조선을 세운 청주(淸州)한씨(韓氏)는 선우(鮮于)씨와 함께 기자(箕子)의 후예라고 하는 만큼 성씨 가운데 가장 오래된 듯하다.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성씨가 모습을 보이는 것은 대개 삼국시대 무렵이다. 백제의 부여(夫餘)씨, 사(沙)씨, 연(燕)씨, 진(眞)씨 등과 고구려 왕성인 고(高)씨, 신라의 왕성인 박(朴), 석(昔), 김(金) 3성과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씨 등 6부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6부성을 비롯한 중국의 성씨를 모방한 성씨가 성행했던 것은 신라말기에서 고려초기였다. 그리하여 고려 때에 많은 성씨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한국의 오래된 족보를 보면 대부분의 시조가 이 시대의 사람인 경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씨가 일반화 되면서 사대부들은 송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조선 최초의 족보가 문화(文化) 류(柳)씨의 가정보(嘉靖譜)이며 그다음에 이어 안동(安東) 권씨의 성화보(成化譜)이다. 그때부터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에 265성, 조선후기 이의현의 ‘도곡총설’에 298성, 이덕무의 ‘양엽기’에 486성, 일제강점기 성씨조사에서 326성으로 정리 되어있다. 2013년 4월 현재 정부의 주민등록시스템 상에 등록된 인구는 5100만 7120명, 성씨는 4706개성으로 나타났다.

성(姓)의 역사는 세계적으로 중국 다음에 우리나라가 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가 건국 된 서기 전 57년부터 삼국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이미 성이 등장하고 있는 반면 이에 비해 이탈리아에서는 겨우 9세기에, 영국에서는 11세기경, 게르만 귀족간에는 13세기에 성이 생겨나고 있다. 그나마도 상류사회뿐이요, 일반 서민에게 성이 보편화된 것은 세례명을 교회에 등록하기 시작한 18세기 중엽부터 이다.

성(姓)이란 글씨를 풀어 보면 알 수 있듯이 여자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이다. 곧 모계(母系)로 성을 이어 내렸던 모권(母權)사회의 유물인 것이다.  고대 중국의 8대성으로 치는 강(姜), 희(嬉), 사,원(嫄), 영, 길, 운, 규가 모두 계집녀(女) 변으로 되어 있음도 바로 모계로 성이 계승되었다는 단적인 증거일 것이다. 모권에 대한 부권(父權)이 쿠데타로 부계(父系)의 성이 자리바꿈을 했지만 인자했던 우리 선조들만은 모계의 성을 살려두는 아량을 베푼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양여자들은 시집을 가면 자신의 본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라야 한다. 자신의 혈통을 남편의 혈통 속에 소멸 당해야 한다. 법적으로는 성만을 상실하지만 관습적으로는 이름까지 상실한다. 부인을 호칭할 때는 남편의 이름 앞에 ‘미세스’만 붙인다. 이름과 성을 모두 증발시키고 살아야 한다. 이 성(姓)의 노예로부터 해방하여 본성을 찾자는 것이 미국 여권운동의 한 쟁점이 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도 서양여자처럼 결혼하면 본성을 잃고 남편의 호적 성으로 바꾸어야 하는 남강여약(男强女弱)의 성 사회이다. 

태고적 모권시대부터 성이 있었던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의 성이 존중되고 그 먼 훗날인 부권시대에 성이 탄생된 나라들에서는 여자의 성을 결혼과 더불어 말살해 버렸음을 알 수 있다. 성에 있어서는 우리 한국이 얼마나 선진국이요 또 종주국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집가도 자신의 성을 끝내 유지하는 우리 한국 여성은 여권이 보장 된 선택받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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