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싸운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다
악과 싸운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6.2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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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선태/경상대학교 축산학과 교수

 
6월 25일을 하루 앞두고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 큰일을 벌였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기밀 분류를 해제하고 전문을 전격적으로 공개한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또 다시 여론이 둘로 갈려 치열한 논쟁에 휩싸였다. 국가정보원은 회담 내용의 진위 여부에 대한 국론 분열이 심화되고 있어 회의록 공개를 결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국내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어 아쉽기 그지없다. 

국가정보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전격 공개한 것은 악과 싸운다고 하면서 악을 행한 것과 다름 아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또 법을 위반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국가의 안보나 기록문화의 보존과 발전에 좋지 않은 악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히 우리 역사에 악한 전례로 남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하든지 간에 청와대에서 녹취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은 그 자체로 대통령기록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정보원은 그 기록물의 공개 여부를 자의적이고 월권적으로 판단하고 공개하였다. 그래서 앞으로 또 어떤 기록물들이 비밀을 깨고 공개될지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국가의 안보를 흔들거나 국론의 분열을 조장할 수 있는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 행여 정치권이 그런 일을 강요한다고 할지라도 지켜져야 할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 지킬만한 가치가 없는 비밀은 없다. 그래서 가치가 없는 비밀이라는 판단은 자의적인 판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국가정보원이 비밀문서의 가치가 없다고 설명한 것이나 국론분열이 심화됐다는 설명은 모두 그들이 자초한 일에 대한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외교전문가들에 따르면 외교가에서 합의한 것은 그 과정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관례라고 한다. 특히 국가 간 정상회담의 경우 적어도 수십 년 동안은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외교적 관례라고 한다.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도 정상회담 대화록을 함부로 공개한 전례가 없다. 따라서 이 분야 전문가들은 정상회담 내용을 우리 측에서만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은 외교적으로 비정상적이라고 말한다.

우리 정부는 지난 개성공단 잠정 중단 과정에서 북한이 협상의 일부 내용을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한 있다. 북한이 신의와 비밀의 원칙을 깨면서 남남갈등을 유발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남북정상 회담내용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였으니, 향후 남북관계나 다른 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어떤 파장이 미칠지 눈에 보듯 뻔하다.

이런 점에서 국가정보원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전문을 공개한 것은 두고두고 박근혜 정부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지난 남북 고위급 회담을 준비하면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요구했던 박근혜 정부의 말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이번 대화록 공개는 남북 간 신뢰를 형성하는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일뿐만 아니라 오히려 북한을 자극해 보복적인 폭로전이 유발될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로 보인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해 새누리당이 통합진보당을 ‘종북 좌파’로 몰아붙였을 때, 박근혜, 정몽준, 김문수 등이 북한을 방문하여 한 말들을 모두 공개하면 남한 사람들이 까무러칠 것이라고 말 한 바 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하여 2002년 5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의 접견을 받고 평양시의 여러 곳을 참관하면서 친북 발언을 적지 않게 했다고 밝힌 점이 매우 우려스럽다. 이런 식의 보복식 폭로는 남북관계를 더욱 경색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의 국론분열을 촉매 할 것이 당연시되기 때문이다.

또 조만간 있을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한중 정상회담도 걱정이다. 당면한 북한문제 뿐만 아니라 한중 FTA 등 굵직한 현안 등은 비밀하게 논의되어야 주제들이다. 그런데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신뢰에 금이 간 박근혜 정부를 상대로 중국 수뇌부가 비밀한 대화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최고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이 신의와 비밀의 원칙을 깨고 회담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앞날에 빨간불이 켜져 버렸다. 악과 싸운다는 명분으로 악을 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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