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볼)일 없이 산다
별(볼)일 없이 산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5.30 0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민지/SK에너지
사보편집기자

신중, 겸손, 결단력. 세 단어가 나를 설명하는 자기소개서 속 핵심 키워드가 됐다. 18번째로 지원할 회사의 인재상이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에피소드로 포장된 자기소개서 속의 ‘낯선 나’는 탈락의 좌절과 백수의 궁상 따위는 결코 느껴서는 안 될 능력자였다.

능력자는 서류 심사에 합격했다. 3일 후로 다가온 면접을 위해 외워둔 1분 자기소개 멘트를 연습하고 있으려니 배가 고파왔다. 컵라면과 김밥 중 오늘은 무엇으로 배를 채울까, 진지하게 고민한다. 자기소개서 속 ‘신중’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월세 날이 다가왔다. 차마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을 열고 수화기 속 엄마를 부른다. “이번 달 까지만 도와주세요. 제가 아직 부족해서요….” 쿨하게 현실을 인정했다. ‘겸손’한 나의 모습도 거짓은 아니었나보다.

속이 상했다. 면접 탈락에 대비해 19번째 입사지원서를 쓰려던 애초의 계획을 수정해 한 잔 걸치러 나섰다.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 할 일은 잊어버리자!” 흥이 올라왔다.

면접에 합격했다. 19번째 입사지원서는 역시, 안 쓰길 잘했다. 그런데 자기소개서 속 능력자는 온데간데없다. 비슷한 단어들로 자신을 포장하고 합격했을 입사동기들도 마찬가지다.


저녁 약속을 내일로 미뤘다. 팀장님이 야근을 하시기 때문이다. 이 대리님의 잘못을 뒤집어썼다. 막내이기 때문이다. 보고서가 퇴짜를 맞고 ‘능력없는 놈’이라며 핀잔을 들었지만, 내 처지가 그리 나쁘진 않다며 자위했다. 수많은 드라마 속 말단 직원들은 상사의 손을 떠나 날아오는 서류를 얼굴로 받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한손엔 홧김에 작성한 사직서를, 한손에는 야근하는 팀장님께 사다드릴 커피를 들고 고민을 거듭한다. 어느 때보다 신중한 모습이다.

19번째 입사지원서를 내도 붙을 것 같지 않다. 지난 달 긁은 신용카드의 결제일이 다가온다. 월세 날이 다가오면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게 될 테다. 현실을 인정하는 모습은 참으로 겸손했다. 또한 신속했다.

박차고 나오는 대신 찌그러져 있자. 이대로 나가는 것은 18장의 자기소개서를 꾸며내느라 ‘창작의 고통’을 실감했던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애사심이 가득한, 이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될 것임을 강조하지 않았나. 결단을 내렸다.

팀장님이 드디어 퇴근하셨다. 뒷정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회사를 나가기 전, 팀장님의 모니터에 붙은 중요한 포스트잇 두 개를 몰래 떼어내 버렸다. 발신전화번호를 팀장님 번호로 수정한 뒤 이 대리님에게 ‘행운의 편지’ 문자를 전송했다. 오늘 나에게 막말을 퍼붓던 부장님의 컴퓨터에는 악성코드를 설치해드렸다.
너죽고 나죽자며 과감하게 복수혈전을 치르는 일도, 중요하고 더럽고 치사해서 관둔다며 뛰쳐나오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신중하고 겸손하고 결단력이 있어, 오늘도 별 일 없이 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