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에 숨 쉬는 면암 최익현
대마도에 숨 쉬는 면암 최익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6.27 16: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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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ㆍ경남국학원 이사

 
일본은 세계에서 지진이 많은 나라 중의 하나로 동북지방에 큰 지진으로 일본여행객이 줄었다가 다시 조금씩 늘어난다고 한다. 대마도는 날씨가 좋을 때는 육안으로도 서로 보일 정도로 가깝다.

필자가 학생들과 역사기행을 갔을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려서 놀래기도 했다. 마침 한 학생이 선생님 이렇게 핸드폰이 터지니까. 대마도는 우리 땅이 아닙니까? 해서 잠시 당황하기도 했다. 대마도의 가장 아래 하대마도에 도착하면 면암 최익현 선생의 영혼을 만날 수 있다.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면암 선생(1833.12.5~1906.11.17)은 1855년(철종 6년)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일하며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는데 앞장서는 등 강직한 선비로 관명을 날렸다.
면암은 1868년(고종5년)부터 경복궁 중건을 위한 당백전을 발행해 재정 파탄을 가져왔다고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는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고 퇴출을 주장하여 대원군이 실각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다시 투옥되면서 그 유명한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이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浪人)들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사건으로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포기하자, 국제정세를 파악한 조선정부는 일본세력에서 벗어나고자 급격히 친러 방향으로 기울자, 왕실과 친러파들은 러시아공사 K. 웨베르와 접촉하면서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친러파인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 등을 등용하여 제3차 김홍집(金弘集)내각을 구성하였다. 친일내각에서는 모든 방면에서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명성황후의 참변과 단발령의 시행으로 민심이 크게 동요되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의 폭발로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듬해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일본의 계획에 타격을 주는 을미사변을 일으키며 본격적인 병탄의 야욕을 드러내자 고희를 넘은 노구를 이끌고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여 일본군과 맞서 쓰러져 가는 나라의 국혼을 바로 세우고자 혼신을 다했지만, 차마 같은 동포는 죽일 수 없다하시며 의병을 해산 하고 체포되었다.

국내외 여론을 두려워한 일본은 살리지도 죽이지도 못한 채  면암의 상징성이 두려워 국내에 두지 못하고 대마도로 압송하였다. 선생은 비록 몸은 적의 땅에 가지만 적의 땅을 밟지 않겠다며 부산항에서 버선을 벗어 고국의 흙을 깔고 대마도로 간 뒤 ,투옥 되었으나 왜구가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 하시며 단식 항거 하셨다.
당황한 일본은 온갖 회유로 단식을 중단하게 하려 하였으나 끝내 거부하고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선생의 죽음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나라의 큰 별이 갔다며 비통에 빠져 대성통곡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군 10만은 두렵지 않으나 최익현은 두려운 존재다 할 정도로 강골한 하셨는데,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은 안중근 의사에게로 이어져 여순 감옥에서 면암 선생의 뒤를 이었다. 선생의 영혼은 대마도 남쪽 이쯔하라의 백제시대 스님이 창궐한 수선사(修善寺)에 모셔져 있다. 가끔 찾아오는 후손들의 술잔에 고국으로 올라가는 태풍을 막아 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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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성 2013-09-27 19:18:25
면암님...편히 잠드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