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와 오랑주리 미술관
모네와 오랑주리 미술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7.1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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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은 프랑스 국가가 크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년)라는 한 화가를 위하여 1927년에 만든 미술관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프랑스가 이 전쟁에서는 연합국과 함께 승리를 했다. 4년간에 걸친 처참한 전쟁을 치르고 나서 48년 만에 독일에 설욕을 한 프랑스는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1917년부터 전시내각을 이끌어 왔던 수상 클레망소는 평소에 모네와 가까운 친구였고 그의 그림에 대한 예찬자였다. 그는 모네에게 이 승전을 기념할 작품을 특별히 그려 줄 의향이 있는지를 타진해왔다. 모네가 평소에 그려 온 수련(睡蓮) 연작(連作)을 그려서 국가에 기증을 하면, 국가는 그 그림을 새로운 전시공간에 영구히 전시하겠다는 제의였다.

모네는 1883년부터 살고 있던 지베르니(Giverny)에 1890년 자신의 집을 마련하면서 주변토지를 사서 수련이 자라는 연못을 만들었다. 1874년 ‘인상-해돋이’이후 인상주의 화가로 일관해온 모네가 1888년부터 ‘짚더미’, ‘루앙대성당’, ‘포풀러나무’등 하나의 테마를 여러 가지 날씨, 계절, 시각의 광선 아래서 그리는 ‘연작’에 집중을 하다가 1900년부터 ‘수련’으로 옮겨온 후 그의 그림에는 중대한 새로운 특징이 나타난다. 모네의 그림은 더 이상 객관적인 묘사에 머물지 않고 주관적인 감성표출로 이행해 간 것이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미술의 단초를 연 위대한 첫 걸음이었다.

가장 사랑했던 아내 아리스와 장남 장의 연이은 죽음, 그리고 잃어가는 시력 등, 1910년 70세를 넘기며 모네는 여러 가지 비극을 겪게 된다. 그럴수록 자기가 그린 수련으로 온 벽이 꾸며진 전시실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가 자라났기 때문에, 클레망소의 제의를 받아 들여 1918년에 자기 그림의 공여 및 전시에 관한 계약을 정부와 맺었다.

그러나 만년의 모네는 백내장으로 두 눈의 시력을 거의 상실했었다. 그는 그가 사망하기까지 자기의 그림을 전시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자기 그림은 다른 사람의 그림과 같은 공간에 전시해서는 안 되며, 관람자와 그림 사이에 어떠한 유리나 칸막이 같은 것도 설치해서도 안 된다는 조건을 계약서에 포함시켰다. 그가 사망한 몇 개월 뒤인 1927년 튈르리 공원 한 구역에 오랑주리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모네의 구상에 기초하여 건축가 르페브르(Camille Lefèvre)가 나폴레옹 3세 시절 귤감류 재배 온실로 사용한 건물을 개조해서 완성한 것이다. 천을 바른 유리 천정으로부터 자연광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높이 2m, 넓이 500㎡의 두 타원형 홀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전시실에는 각 홀마다 4점씩 수련 8점이 긴 벽면을 가득 채웠다. 모네가 요구한 조건을 다 충족시킨 것이다.

그러나 개관 당초의 오랑주리 미술관은 1965년 발터-기욤 컬렉션(la collection Walter-Guillaume)을 추가로 전시하기 위해 실시된 2층 증축공사로 변모되고 만다. 2층이 들어서서 수련 전시실에는 자연광이 차단된 것이다. 더구나 입구에 넓은 로비가 없어지고 새로운 전시 공간으로 이어지는 큰 계단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수련’ 전시실로 바로 갈 수 있는 길이 차단되어, 미술관 전체가 관람하기 불편한 곳이 되고 말았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큰 개장공사가 2000년에 시작되어 2006년에 끝이 났다. 프랑스가 모네에게 약속한 ‘수련’의 전시공간이 다시 복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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