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우/전 남해문화원장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에 대한 국가차원의 조사는 물론 진상규명과 아울러 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한 그 대책이 시급하다.
우리민족의 분단, 현대사에 숨겨져 있는 恨서린 사연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겪지 못한 고통과 그 처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한편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정권의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을 전향시켜 보호 한다는 취지로 1949년 결성 했으나 좌익 인사뿐만 아니라 농민과 같이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근대 이후 국내 민간인 학살사건 중 최대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출범한 후 지난 과거의 진상을 보다 소상히 밝혀 이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명예회복은 물론 그 보상대책도 이뤄줘야 할 것으로 본다.
한편 남해군 설천면 모천리 柳 洪(73 )씨의 형 홍섭(29)씨는 설천면 인민회 총무책으로 끌러 갔으며 남해읍 외금 柳東仁(70 )씨의 친형인 동원(29)씨도 젊고 아주 똑똑한 인물로서 그 당시 제중의원에 한의사로 근무하다 여름 새벽에 붙들려 간 후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이다.
1950년 7월 남해보도연맹원 160여명은 대부분 이동면 복곡과 강진만 바다 진섬에서 또는 각 면 별로 해서 집단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설천면 문항 앞바다에 있는 강진만 진섬에는 30여명이 로프에 묶인 채 총살과 함께 바다에 수장됐으며 이동면 복곡 깊은 산에도 33명이란 보도연맹원이 아무런 이유 없이 끌려가 무자비로 집단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류홍열 (서울 강북구 우이동)씨는 보도연맹이란 이름으로 학살당한 불쌍한 젊은 넋들은 대부분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다 영문도 모른 채 불러 갔다가 떼죽음을 당한 후 한 가정까지 쑥대밭이 된 원통한 죽음이라며 지난 2000년 6월25일 청와대를 비롯한 관계요로에 청원서를 제출한 바도 있다.
이청원서에 따르면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은 주로 미군정을 반대했던 사람이거나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했던 사람 또는 해방 후 인민위원회 등에 가입했으나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등에 저촉되는 간첩이나 빨갱이가 아니였다는 사실, 그렇다고 과격한 시위 한번 못해본 순박한 농촌 청년들이였다고 덧붙였다.
보도연맹원으로 강제 등록시킨 것도 경찰에서 한 짓이었으며 전쟁에서 밀린다고 경찰서로 불러들인 후 오늘날까지도 그 행방과 사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을 위해 어떤 이적행위도 한일이 없으며 인민군이나 김일성을 찬양한 적도 없었다고 하면서 해방 후 이승만세력이 아니라는 경찰의 분류 때문에 보도연맹원으로 강제 등록되었을 뿐 형을 받고 복역을 했거나 전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며 오직 농촌에서 농사일과 고기잡이 등 생계를 위해 일해 온 착실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밝혀두고 있다.
또한 강진만 수장과 복곡학살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500여명도 진주서 집단학살 당했다는 것이다. 남해경찰서에서 진주 교도소로 끌려간 수십 명도 그때 학살되었을 것으로 보고 시체를 찾지 못한 유가족이나 아직까지 사망처리도 되지 않은 행방불명자 상당수가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보도연맹과 관련해 학살당한 이들은 남해에서만 최소 160여명이 죽은 것으로 과거사 정리위원회 출범이후 밝혀진 것으로 추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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