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회담과 스탈린의 욕망
얄타회담과 스탈린의 욕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9.11 16: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망이 거의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을 때,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들이 소련의 크림반도 얄타에 모여 회담을 열었다. 그것이 1945년 2월4일부터 11일까지 8일간에 걸쳐 있었던 얄타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전쟁을 조속히 끝내는 문제와 함께 전후 처리 문제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협의가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사안들이 결정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스탈린의 주장과 요구가 거의 여과 없이 수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은 1941년 6월22일 독일이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전격적으로 침공해와 전쟁 초기에는 괴멸적인 대패를 당했으나, 소련군은 이 어려움을 겨울추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극복하고, 1943년부터 대반격에 나서서 동구권을 석권했으며, 1945년 1월에는 폴란드를 점령하고 베를린 근교까지 진격해 와있는 상태였다.

미국의 루즈벨트는 아시아에서의 대일 전쟁을 소련의 참전을 이끌어내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키고, 영국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국제연합 창설에 소련을 참가시키려는 욕구에서 처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탈린의 웬만한 요구는 적극 수용했다.

그 회담에서 결정된 중요한 협약 내용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독일 및 베를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 군이 4개 지역으로 분할 점령한다. 그러나 영국에서 귀환한 자유 프랑스군의 기여도는 낮기 때문에 점령지역은 미국과 영국 군 할당지역 내에서 제공한다.

2) 폴란드의 주권은 회복되나 동부 국경선은 옛 러시아 제국과의 국경선인 커즌 선으로 책정하여 그 동쪽의 영토를 소련에 할양하고, 그 대신 서쪽의 국경선을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옮겨 비슷한 면적의 독일 땅을 흡수하도록 하여 결과적으로 국토 전체 면적이 약간 축소되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진 형태로 결정된다.

3) 스탈린은 유럽에서 대독 전투가 종료되는 시점에서 3개월 후 대일 참전을 약속하고, 참전 보상으로 러일전쟁으로 상실한 사할린 남부지역과 쿠릴열도를 반환받고, 만주(지금의 중국 동북 3성) 내의 철도와 항만의 권익을 다시 확보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줄 것을 요구조건으로 제시했다.

4) 한반도를 일본에서 해방하여 적절한 과정을 거쳐 독립시킨다는 카이로선언은 그대로 승계되었으나, 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시킨다는 구체적인 방안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얄타회담에서 한반도가 각기 다른 점령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된다는 언급은 없었다. 분할점령은 5개월 뒤 7월17일 시작된 포츠담회담에서 소련군이 일본의 만주 주둔군인 칸토군 관할지역인 북한까지 점령하기로 결정되었다.
8월9일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반도 전체를 점령할 기세를 보이자, 극동연합군최고사령부는 9월2일 38선 이남을 관할한 조선주둔군은 미군이 무장해제를 한다는 결정을 소련에 통보하고, 9월8일 미군이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적이고 기술적인 임시조치가 68년에 걸친 국토의 분단과 민족 상잔의 비극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한반도에서 부동항을 얻겠다는 스탈린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만주를 점령했던 소련이 연합국으로부터 보장 받은 권익을, 그 뒤에 주인이 바뀌긴 했지만 장제스 국민군에게는 아무런 토도 달지 못하고 넘겨주고 철수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6∙25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스탈린의 커다란 초상화를 김일성 것과 같이 들고 시가행진을 하던 뉴스 필름 속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