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와 프랑스 혁명
볼테르와 프랑스 혁명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12.1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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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세계사에서는 대체로 계몽시대의 출발시점을 뉴턴의 '프린키피아 가 출간된 해인 1687년으로 본다.


이 책에서 뉴턴은 베이컨의 사고 방법, 갈릴레오의 역학, 데카르트의 수학을 토대로 해서, 그가 당시에 속해 있던 영국 왕립학회 여러 가지 연구성과까지 아우르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이론인 ‘만유 인력의 법칙’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계몽시대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것은 그가 발견한 이론 자체보다는 그 이론에 도달한 ‘방법론’ 때문이었다. 즉 관찰하고, 일반화하고, 실험하는 방법을 가장 중요시하고, 그 결과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 방법론은 비과학적인 분야인 신학, 역사, 도덕, 정치에도 응용될 수 있는 것이다.
볼테르(1694~1778년)는 사학자들이 18세기를 '볼테르의 세기'라고 부를 정도로 계몽사상가의 대표로 꼽히고 있다. 그는 1738년 '뉴턴 철학의 기본요소'를 샤틀레 후작부인과 공동으로 저술할 정도로 뉴턴에 경도했다.

볼테르는 만년에 계몽사상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백과전서'편찬에 협력하고 기고도 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불합리와 미망을 강요하고 비신도들을 탄압하는 광신적 종교권위에 대한 투쟁이었다. 이러한 그의 반교권적 자세를 명확히 한 저작으로 '철학사전'이 있다. 그 책의 A,B,C 순으로 된 맨 첫 항목이 Abbé(神父)이다. 해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신부여, 당신은 아베가 아버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도 아버지가 되면, 국가에 쓸모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남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의무를 다하면, 당신에게 사고하는 존재가 태어날 것이다. 그러한 행위에는 신성한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깎고, 작은 목걸이를 하고, 짧은 망토를 걸치고, '시간전례'를 읽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의무도 지는 일도 없이 두둑한 성직록만을 기대하는 신부는 아베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볼테르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11년 앞에 두고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혁명을 예비한 가장 중요한 인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Ancien Régime)의 모순에서 발생하였다. 추기경 등 로마 가톨릭 고위 성직자로 구성된 제1계급과 귀족들로 된 제2계급은 모두 인구의 2% 정도밖에 안 되면서 면세 등의 혜택을 누리고, 주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하였다. 인구의 약 98%를 차지했던 제3계급으로 부르주아지를 포함한 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혁명 전야에 급히 소집된 제3부회의 대의원 구성 수를 보면 성직자 247명, 귀족 188명, 평민 500명이었다. 그러나 3부 합동 회의 표결권에 대한 이견으로 효과적인 대책을 세워보지도 못하고 혁명이 발발하고 말았다. 어느 의미에서 프랑스 혁명은 성작자들의 과도한 세속적 권리와 부에 대한 집착에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공포정치를 폈던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혁명의 절정기에 가톨릭의 신을 대신하여 이성신을 섬기는 ‘최고존재의 제전’을 튈르리 궁전에서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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