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민족(中國民族)의 구성(構成)(4)
중국민족(中國民族)의 구성(構成)(4)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2.0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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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한국국제대학교 국제한국어교원학과 교수·지리산막걸리학교 교장

중국민족의 구성에 대해 더 알아보자.


臺灣高山族 : 대만 고산에 산재하고 있는 약 25만명의 고산족은 중국 남부에서 이동되었다거나, 서양의 항해 민족으로부터 번식되었다고 하는데, 얼굴에 칼자국을 남기고 사람머리를 베어오는 기속(奇俗)을 가졌다가 이젠 문명화 되었다.
孟吉蔑族 : 남아시아계의 민족으로 중국의 중남반도에 약 30만명이 분포되어 있다.
塔吉克族 : 신강성 포리현 등지에 분포된 인디안계의 민족으로 약 1만 명에 달한다.

지금까지 중국민족의 분포 상황을 살폈다. 그러나 여기에는 끊임없이 이체질 간의 갈등과 충돌, 그리고 갈등과 충돌에서 빚은 내경(內傾)의 힘, 곧 한족에게의 동화(同化)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고원(高原)이나 산지(山地)에서, 기후상으로 혹한이나 염열에 시달리는 변방민족은 한사코 따뜻한 평원을 찾아 내침의 욕구를 발동했다. 이로 말미암아 중원에 사는 한족은 축성(築城)에 온 힘을 기울였고, 또 이 외환(外患)으로 내와 민족의 상호 이동도 불가피했다. 결과적으로 변방 민족의 대내적 발전과 중원 민족의 대이동이 상대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오호란화(五胡亂華, 316)를 비롯하여 유연(柔然) 부족과 돌궐(突厥) 부족이 편승했고, 당대(唐代) 때에는 돌궐과 거란, 오대(五代) 때에는 요(遼)·여진(女眞)·금(金) 등의 계속적인 발호를 거쳐 중원을 어지럽혔지만 끝내는 한족에 귀종(歸宗)되고 말았다.

이와 함께 민족 융화 단결의 조건이 되는 것은 곧 중원 민족의 이동이다. 먼저 진(晉) 때의 오호란화를 피해 대거 남쪽으로 피난의 행렬을 이루었는데, 그들의 남도 노선은 다음과 같다.

(1) 섬서(陝西)·감숙 및 산서(山西)의 일부 주민이 양자강을 건너 동정호(洞庭湖) 지역으로, 혹은 광서(廣西)의 계림(桂林)을 지나 광동(廣東)의 서부까지이다.

(2) 하남(河南)·하북의 일부 주민이 양자강을 건너 강서(江西)의 파양호 구역으로, 혹은 광동과 복건의 접경까지이다.

(3) 산동(山東)·강소(江蘇)·안휘(安徽)의 일부 주민이 양자강을 건너 태호(太湖) 지역으로, 혹은 절강(浙江)·복건의 연해까지이다.

두 번째로 남조(南詔)의 내침(內侵)에 따른 민족의 이동이니 당대 때 운남(雲南)에 할거하던 묘예(苗裔)들이 화남(華南) 일대에 준동하며 소란을 피우니 남조의 소란이 끝나면 원대(元代)까지 수많은 피난 행렬은 민족의 이동이라고 할만큼 변혁을 불러왔다.

이같이 민족은 비록 갈등과 내란의 소용돌이에서 무수한 이합(離合)을 연출했지만 결국 하나로 대단원을 이룰 수 있었음은 혈통의 분열에서 온 것이 아니라 문화의 동화력에서 온 것이다. 중국이 지역적인 조건으로 보아서도 유럽처럼 수십 개의 국가를 형성할 수 있음에도 때마다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것도 한문화의 동화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만주족이 중국을 통치한 지 200년에 한민족을 만주화하기는커녕 오히려 한족에 동화되었음은 바로 중국 한문화의 동화력에서 기인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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