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익/전)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대한 불교 조계종(曹溪宗)의 중천조(中闡祖)인 고려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땅에서 쓰러진 자는 스스로 땅을 짚고 일어나라”고 갈파하셨다. 영국 속담에 ‘넘어짐으로써 안전하게 걷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하였고, 형원소어(荊園小語)에 ‘한 번의 좌절을 겪으면 한 번의 식견이 자란다(經一番挫折, 長一番識見)’고 하였다. 불이 쇠붙이를 단련(鍛鍊)시키듯 역경(逆境)은 사람을 단련시키는 법이다.
위대한 종교지도자도 무거운 짐을 잠시 들어 올려 줄뿐이지 결코 짐을 대신 져주는 분은 아니다. 인생이라는 무거운 무게의 짐을 지고 가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일 따름이다.
절에 가면 절 입구에 일주문(一柱門)이란 것이 있다.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는 문이다. 나의 삶에도 작은 일주문이 있다. 하나는 종교라는 기둥이고, 하나는 삶이라는 기둥이다. 두 개의 기둥을 지나야 나를 찾게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경북 문경의 운달산(雲達山)에 가면 김룡사(金龍寺)라는 절이 있는데 일주문 기둥에 달아 놓은 주련(柱聯)에 이런 글귀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이 문에 들어서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리라. 분별없는 빈 그릇이라야 해탈을 이루리(人此門來莫存知解 無解空器大道成滿)'
세상 사람들은 모두들 쫓기듯 살아가고 있다. 고요한 마음으로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모두들 자기를 잃고 살아가고 있다.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노는 삶은 온전한 삶이 아니라 반쪽의 삶인 것이다. 선가(選歌)에 이런 말이 있다. ‘온 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죽어라(生也全機現 死也全機現)’ 여기서 ‘온몸’이란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리라. 즉 한 눈 팔지 말고 최선을 다해 살라는 말이다. 그래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자기 것이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생의 시간에 온몸을 바치려면 누구라도 외로워 져야 한다. 홀로 차를 마시면서 차(茶) 한잔에 자족(自足)하는 노승(老僧)의 모습에서 우리는 깨달음의 실존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너무 복잡하게 사는 것 같다. 밥을 먹을 때도 온갖 계산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고, 잠잘 때도 이런저런 잡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自畵像)이다.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체험하지 못하고 남의 삶을 기웃거리는 이가 우리들인 것이다. 얼마나 우습고 어리석은 일인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을 구경하고 경영하는데 관심이 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을 싫어하고 걱정하고 기피하며 숨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 세상을 만나 환희 속에 살거나, 세상을 뛰어넘어 살기도 한다. 혹은 좋은 시절 만나면 시선(詩仙) 이백(李白)처럼 ‘세상사는 게 꿈과 같으니 술잔이나 기울이리라’라며 허허롭게 사는 방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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