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목일에 그를 생각하노라
식목일에 그를 생각하노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4.1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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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미국인 칼 밀러(Carl Miller)는 해방직후인 1945년에 연합군 중위(25세)로 한국에 왔다가 한국에서 전역한 후 한국은행 고문으로 일하면서 서울의 증권사에 다니며 증권계의 큰 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한국인의 순박한 모습에 반해 한국에 정착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서해안 여행도중 충남 태안군 천리포의 아름다운 경관에 매료되어 그곳에 수목원을 조성할 것을 결심을 하고 1962년부터 나지막한 해안의 척박한 땅과 인근 야산을 사 들여 늘려가면서 3만평쯤 되었던 1970년부터는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조성초기의 천리포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30cm만 파도 소금섞인 흙이 나오는 나무나 식물이 자랄 수 없는 지독한 박토(薄土)였을 뿐만 아니라 나무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주말이면 천리포에 집념하며 한국식물도감이 헤져 떨어질 정도로 식물 공부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동이 트기전에 일어나서 나무를 돌보았다. 나무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그에게 나무가 자식이자 손자였다.


그의 30년간의 끈질긴 집념 결과로 충남 태안군 천리포에 18만7065평(618,397㎡)의 수목원이 조성되었다. 수목원에는 세계 50여개국에서 수집한 10,300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특히 목련 종류는 전 세계 500여종 중 410종을 모았다. 외국에서 들여온 수종(樹種)의 규모로는 국립임업시험연구원의 것을 능가한다고 한다. 그런 공로로 세계 수목협회(International Dendrology)는 2000년 10월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Arboretum distinguished for merit)으로 지정했다. 아시아에서는 첫 번째이고, 세계에서는 열 두 번째이다. 그는 1978년 가을 남해안 자생식물 탐사 중에 감탕나무와 호랑가시나무가 자연 교잡된 전남 완도에서만 자생하는 희귀종을 발견하게 되었다.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 그는 이듬해인 1979년 민병갈(閔丙渴:펜실베니아 민씨)이라는 이름으로 백인남성으로는 한국에 최초로 귀화(歸化)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모든 경로를 통해 자신의 발견이 세계 최초임을 확인했다. 그는 식물의 한국어 이름을 ‘완도호랑가시’로 붙이는 한편, 발견자와 서식지의 이름을 붙이는 국제규약에 따라 ‘Ilex x Wandoensis C. F. Miller’라는 학명(學名)을 붙여 미국의 호랑가시학회(Holly Society of America)에 보고했다. 학회는 기준 표본과의 대조 등 몇 단계의 절차를 거쳐 그가 발견한 이 나무를 신종(新種)으로 공인(公認)했고, ‘완도호랑가시’는 1982년에 ‘공인 호랑가시 수목원(Official Holly Arboretum)으로 공식 등록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을 때 그는 “그건 정말 대단한 발견이야. 식물학도에게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영광이지. 천문학자가 새로운 별을 발견한 거나 다름없어. 후손이 없는 나에겐 영원히 살아 있을 자식을 하나 얻은 것과 다름없지”라고 기뻐했다. 그는 목련꽃 망울이 터지는 장면을 놓치기 싫어 4월에는 바깥 약속을 하지 않고 천리포 수목원에 틀어 박혀 지냈다고 한다. 그렇게 살다 2002년 4월 목련꽃이 피는 계절에 향년82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런 공로로 임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통령이 수여하는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고, 2005년 4월 5일 식목일기념 정부에서 제정한 '숲의 명예전당'헌정사 선정위원회는 그를 국립수목원 내 명예의 전당에 헌정하게 되었다. 그가 제2의 조국 한국에 남긴 마지막 선물, 천리포 수목원은 그의 죽음 후에도 푸른빛을 간직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살던 천리포수목원의 한옥(韓屋) 후박집 거실에 목각(木刻)되어 걸려 있는 탈속(脫俗)한 선비(先妣)의 시구(詩句) 내용이 감동을 더해 주고 있다. 꽃다운 애정과 향기로운 생각이 얼마인지 아는가? 산사(山寺)의 뜨락에 핀 목련은 내가 세속 버린 걸 한없이 후회하게 만드노니. 텅 빈 마음 꽉 찬 마음 님께서 내 마음 모르신들 어떠하며 벗들이 내 세정(世情) 안 돌보면 어떠하리. 깊은 산 향풀도 제 스스로 꽃다웁고 삼경(三更) 밤 뜬 달도 제멋대로 밟삽거늘 하물며 군자가 도덕사업 하여갈 제 세상의 알고 모름 그 무슨 상관이랴.

그를 태운 상여(喪輿)가 이승을 떠나고 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에 헤이 에 헤이. 상여꾼들의 후소리 합창은 더욱 구슬펐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유언장엔 “나의 모든 재산은 재단법인 천리포수목원에 유증(遺贈)한다”로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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