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하루
이상한 하루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6.01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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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요 몇 달 동안 나는 지나치게 바빴다. 게다가 오늘은 이상하게 바쁜 날이었다. 지금 밤 열시반, 일기를 쓰는 것처럼 이 글을 쓴다. 지난 밤 자정을 넘기면서 시작된 그 지나친 일들을 꼼꼼히 되짚어 보려한다. 별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 사회가 올데까지 왔다는, 이미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는 위기감을 스스로 진단해보고자 한다.


내게 잠은 늘 모자라니 잤다하면 죽은 듯이 자는데 새벽 2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그야말로 비몽사몽 속에서 전화기 쪽으로 누운 채 거의 기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지인의 남편이었다. 지인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이러다 예상치 못한 ‘사고’가 두렵다며 좀 와달라고 했다. 급히 잠에서 깨며 핸드폰을 챙겨들고 달려갔다. 지인의 남편은 집 앞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지인은 안에서 누군가와 싸우는 투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혼자서 저러고 있습니다. 혹시 자살을 할지도 몰라 선생님을 불렀습니다” 지인의 남편은 나를 보자마자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간단히 상황을 듣고는 지인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다행히도 지인이 문을 열어주어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지인은 도로 문을 철저히 잠그며 남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는 여러가지가 걱정되고 겁도 났다. 사람이라도 정신이 온전해야 사람이지 그렇지 못하면 위험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두려운 마음을 감추고 지인의 얘기를 끝까지 들었다. 철없이 어릴 때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고 지금까지 살면서 남편에게 품은 원망이 얘기의 대부분이었다. 삼십대 초반인 지인은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결국 끝까지 의지하고 믿을 만 한 사람은 또한 남편밖에 없는 게 지인의 딜레마였다. 또 약 이년 전에 개업한 미장원이 성업중이기는 하지만 그 ‘성업’이 있기까지 말대로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그에 따라오는 마음의 격랑이 심한 듯 했다. 겨우 진정시키고 지인의 남편을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하고 나는 돌아왔다. 누웠더니 새벽 4시가 넘었다. 다시 잠을 청해 죽은 듯이 잤다.

8시 반 경에 다시 전화 오고, 새벽과 똑같은 언행을 반복하며 갔더니 지인의 남편은 이미 신경 정신과에 의례를 한 후였고 앰블런스가 집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나도 또한 입원을 도울 수밖에 없었고 지인은 비교적 무사히 입원했고 약 2주간 치료를 받아야 퇴원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나는 그 지인에게 거의 한달 간 수시로 불려다닌 끝이라 우선 이제 잠 좀 제대로 자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한 숨 돌리며 낮을 보냈는데 저녁쯤에 멀리 남도에 사는 시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거의 20년간 우울증 약을 먹는 시누이는 횡설수설했다. 무심코 듣다가 보니 시누이는 발작을 일으킨 것이었다. 워낙에 오래 앓고 있는 사람이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나자 이상하게 나조차도 힘이 쭉 빠졌다. 사십대 중반을 지나고 있는 시누이는 생각할 때마다 가엾다. 남도의 무인도 같은 작은 섬에서 태어난 시누이가 이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에 적응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테니까.

밤이 깊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깊어가지는 못하고 잠만 앗아가고 머릿속에서 맴맴 맴만 돌 뿐이다. 정신과 병동에 갇혀있는 지인은 결국 돈과 소비의 논리에 말려들어 정신이 혼선을 빚은 것이다. 시누이도 도시의 논리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라면 이 돈이 지배하는 이 도시가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다. 어쩌다 돈을 벌어서 도시에서 떵떵거리며 살기도 하지만 조금만 깊이 알고 보면 믿음직한 절대행복에는 근처에도 못 갔다는 엄연한 사실을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고 세상을 원망해서는 해결의 실마리는커녕 정신병동으로 끌려가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세상이라는 것에 무조건 항복하고 백기를 던지고 투항해서도 안된다. 오직 돈만이 대접받는 이 도시와 저 뻔뻔하고 잔악하고 질긴 권력층의 지배논리에 말려들지 않는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분명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자가 똑똑해져야 한다. 똑똑해진다는 것, 그것은 알고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이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라는 이 엄연한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한 휴머니즘을 견지해야한다. 그렇게만 되면, 즉 매순간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 언행하기를 견지하게 될 것이고 그러는 그것 자체가 행복이다.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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