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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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6.0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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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청년기에 접어든 자식들을 대하자니 억지로라도 ‘나의 청년기’를 돌아보게 된다. 후회와 부끄러움과 쑥스러움만이 떠오르는 건 너무도 당연한 것 같다. 학교 선배에게 싸가지없이 굴었던 기억, 이웃 어른들께 버릇없이 굴었던 일, 학교 선생님들께 던졌던 어처구니없는 시건방…. 헤아릴 수가 없다. 그에 비하면 자식들이 하는 짓들은 사실 별것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니꼬운 건 뭘까? 나의 용렬함일까, 자식들의 불찰일까. 실은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짜증부터 나니 이건 또 뭐냔 말이지.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배신감과 어릴 때 하던 대로 실컷 패주고 싶은 이 심술을 또 뭐냔 말이지.


어제 토요일 큰 아이는 자기 짝꿍을 만나러 나갔다. 나는 진심으로 행복한 테이트가 되기를 기원했다. 그런데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밤새 잠을 자다 깨다했다. 잠이 깨면 일어나 큰애의 빈 침대를 보고 별일이다 하고 또 자고 또 깨고…. 아직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던 소위 ‘착한’ 아이인 터라 걱정이 되다가 나중엔 짜증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침이 되어 돌아온 큰아이는 처음으로 외박한 사람답게(?) 무릎을 꿇었다. 그 꼴을 보자니 나는 무슨 코메디를 보는 심경이 되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무릎은 꿇고 ㅇㅇ이야!!”하고 나자 그 간에 참았던 말들이 칼이 되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장학금 심사에서 떨어진 일, 예배를 빼먹은 얘기, 양치를 안 하고 발을 안 씻는 일, 등 삼대 구년 먹은 일까지 들먹이며 시시콜콜 따졌다.

큰아이는 어느새 착한 아이로 돌아와 엄마의 가열찬 잔소리를 묵묵히 들었다. 그꼴을 보자 이상하게 더 화가 치밀어 거의 한 시간을 길길이 뛰었다. 이러다간 무슨 일내지 싶어 꼴도 보기 싫다고 지방으로 쫓아보냈다. 빈 방에 홀로 앉아 가만히 생각해봤다. 내가 지금 왜 이리 화가 나는지. 오래 생각하지 않아 큰애한테 짝꿍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질투! 여자가 질투를 하면 독사가 된다는데.

그렇다고 금새 사과를 하자니 뻘쭘해서 지난 가을에 주워 밀봉해두었던 은행을 깠다. 은행은 신기하게도 겉껍질에 곰팡이만 조금 생겼을 뿐 그대로 있었다. 밀봉한 덕분이기는 하겠지만 진짜 열매를 보호하는 겉껍질의 지독함에 신기하기까지 했다. 똥냄새가 나는 냄새도 여전했다. 은행을 양파망에다 넣고 물을 부으며 발로 밟았다. 그리고 진짜 은행을 가려내어 씻고 또 씻어 햇볕에 말렸다.

오후가 되자 작은애와 큰애가 대판 싸움이 붙었다. 이유를 알아봤더니 또 질투였다. 작은애가 큰애의 사랑이 이뤄진 것에 질투가 일었던 것이고 시비를 틀었다. 평소에 작은애는 샘이 많다. 그래서 작은애를 보며 걱정이 무거운 것도 사실이다. 샘이 많은 것은 인생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하기가 십상이다. 샘이 많다는 건 만족을 모르고 ‘남의 떡’을 넘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물에 대해선 의심을 자주 한다. 이런 심경이 반복되면 남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은 더더욱 믿지 못하고 사사건건 심술을 부리는 불만덩어리가 된다.

이 불만덩어리가 가장 크게 당하는 건 바로 부모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벌이다. “엄마는 나만 미워해, 아빠는 형만 좋아해, 누구누구와 비교하는 건 질색이야”하고 입을 삐죽거리며 의심을 해댄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 벌을 흔히 불행이라는 이름으로 당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부모의 사랑을 의심한 벌은 불행이라는 것이다.

나는 작은애의 의심을 무시로 받는다. 기가 찰 노릇이지만 사실이다. 이 너무 지독하지 않은가! 내 아이에게 불행이 올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달리 손 쓸 방법이 없다는 것. 이미 의심병에 든 사람은 그 의심을 지적당하면 반성보다는 심술이 더 심해진다. ‘칫, 그봐, 나만 나무라지!’ 따위로 구시렁거리며 말이다. 짜증이 나도록 안쓰럽지만 방법은 없다.

불행을 막을 방법은 없지만 불행이 닥쳤을 때는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연구와 궁리를 하다보면 불행이 닥치기 전보다 오히려 좋아지는 수도 기대해불 수 있다. 그런데 그러려면 ‘연구와 궁리’가 치열하게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뭐는 안 그럴 것인가 만은 불행 앞에서는 진정 치열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끈질기게 끝까지 연구하고 궁리해야 한다. 그러는 어느 순간에 보면 불행이라 게 주춤한다. 그때는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 불행을 추격해서 아주 멀리 도망가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작은애의 질투에 뿌리를 내린 심술을 보는 건 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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