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언어(中國言語)와 문자(文字)의 발전과정(發展過程)(Ⅰ)
중국언어(中國言語)와 문자(文字)의 발전과정(發展過程)(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6.22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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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중국 민족의 통일이 문화의 동화력에서 기인했다면 그 문화의 동화력 가운데 하나의 주맥(主脈)을 이룬 것이 문자(文字)다. 때로 민족과 국가는 분열되어도 문자는 같이 했고, 일의대수(一衣帶水)를 가운데 두고 언어는 통하지 않았을지언정 문자는 같이 했다. 통일된 문자가 없었더라면 중국은 오늘의 통일된 유구한 역사를 이룰 수 없었음이 당연했고, 이로 말미암아 중국문화의 성격을 한자의 성격으로 규정지어도 무리가 아닐 수 있었다.


우선 중국문자 그 기원을 살피기로 한다.

중국의 경내에 통용되는 문자로는 한자(漢字) 이외에도 원시적인 상형자(象形字)와 기음문자인 알파벳이 변방민족에 쓰였지만 지금은 모두 한자로 통일되고 있다. 한자가 창제(創制)되기 이전의 전설적인 배경은 한자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이는 인류에게 사물을 기억할 수 있게 보조 역할을 하는 일종의 부호(符號)로서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바 결승(結繩)과 서계(書契)가 그것이다.

결승에 대해서는 ‘장자(莊子)’ 거협편(胠篋篇)에도 고대 제왕의 결승하는 유속(遺俗)을 볼 수 있거니와 고대 동기(銅器)에 새겨진 모양은 타결한 모양으로도 볼 수 있어 그 흔적이 역연하고, 전적의 기록을 통해서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에 “상고 때에는 결승하여 다스렸는데, 후세에 성인께서 그것을 서계로써 바꾸었다” 또는 ‘주역정의 소계사’에 정현(鄭玄)의 설을 인용하여 “일이 크면 그 매듭을 크게 엮었고 일이 작으면 그 매듭을 작게 엮었다”라 했고, 또 ‘주역집해(周易集解)’에도 “옛날에는 문자가 없었고 그 약속할 일이 있을 때 일이 크면 매듭을 크게, 일이 작으면 그 매듭을 작게 했으며, 그 매듭의 많고 적음에 따라 물건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서로 살폈는데, 역시 서로 통할 수 있었다”라 했으니, 여기서 결승은 사건의 대소(大小)에 따라 매듭으로 표시했던 가장 원시적인 기록의 방법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는 오히려 저개발층에서 오랫동안 쓰여왔으니 최근까지 오키나와나 대만(臺灣)의 고산족(高山族)들에게 지시(指示)나 기장(記賬)의 방법으로 쓰였다고 한다.

결승보다 진일보하여 사건을 기록하는 방법이 서계(書契)니, 서(書)는 서적(書籍)이 아니라 그린다[畵]의 동사로 해석되며, 계(契)는 설문(說問)에 따라 ‘계(契)이니 새긴다[刻]’의 동사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를 고대에 치(齒)라고 했으니, 대나무의 한쪽을 새기어 기록하자면 그 새긴 곳이 이처럼 보이기에 한 말이다. 이런 것은 대개 어떤 사건을 기록하기에 쓰이며, 더러는 나무 두 쪽에 똑같이 새기어 위증(僞證)을 방지하는 데 쓰이기도 했으니, 오늘날 말하는 계약은 이런 유습(遺習)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나무나 대에 새길 수 있다는 점에서 문자에 접근되었으며, 또한 새기는 일은 그림에 접근되었는지라 문자가 가지는 상형성(象形性)의 전(前)일보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복희(伏羲)의 팔괘창작설(八卦創作說)과 서계설(書契說)을 함께 묶어 결승(結繩)의 대체물이요, 문자의 선성(先聲)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성질상 따로 취급되어야 한다. 팔괘는 범상징적인 부호로서 자연 현상을 대표한 것일 뿐 개체(個體) 혹은 연대체로서의 문자와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하며, 동시에 팔괘로부터의 한자 기원설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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