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능소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6.29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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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그다지 모질게 춥지도 않았고 눈이 지나치게 많이 오지도 않은 겨울이었다. 그런 만큼 지루하고 지겹던 겨울이기도 했다. 특이할 것은 없지만 권력에 대한 욕구 하나 만큼은 끈질길 것 같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정체가 모호한 사람이 최고권력자가 되기도 한 겨울이었다. 그 지루한 겨울을 닮았다는 생각을 내심 하며 비칠거리며 다가오는 봄을 맞이했다.


봄을 맞으며 가장 큰 나의 관심사는 빌라 앞뜰에 구부정하게 서 있는 향나무가 봄바람에 화답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거의 이십 년을 무든하게 사시사철 푸른기를 잃지 않고 내 곁을 지켜주었다. 향나무가 하도 무든해서 어떤 때는 그의 존재를 잊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다 잊어버린 게 미안해서 조금은 호들갑스럽게 그의 존재에 감사하기도 했다. 특히 풀른 기가 그리운 겨울에 애써 초록빛을 선물해주는 그가 고마웠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는 유난히 힘겨워했다. 내내 살펴봐도 살아가기보다는 죽어간다는 말이 맞을성 싶은 힘없는 모습이었다. 봄이면 씩씩하게 살아나겠거니, 기다렸다.

앞뜰의 다른 친구들은 다 성급하게 싹을 피워올리는데 향나무는 봄 내내 비칠거렸다. 나는 그제야 향나무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맙소사, 능소화 덩쿨이 향나무의 몸통을 감고 있었다. 일부는 이미 가지를 감고 있었다. 능소화 넝쿨은 마치 향나무의 가지인 것처럼 향나무의 색을 띠고 있어서 내가 몰랐다. 그러면 그렇지. 향나무는 사철 푸르기도 하지만 그 생명력도 강하다. 침엽수로 짧은 바늘처럼 생긴 잎이 무성하여 겨울에 눈이 오면 가지가 쩍 갈라진다. 그래도 죽지 않고 그 가지도 찢어진 채 살아간다. 별로 이쁘지는 않지만 소복소복한 잎을 여러 모양으로 가꿀 수가 있어서 정원수로 잘 이용된다. 값도 싸서 이 곳 가난한 동네에까지 오게 되어 나를 만나게 됐다.

나는 서둘러 빌라 관리 아줌마에게 연락해서 능소화를 잘라내야한다고 말했다. 관리 아줌마는 “능소화가 자란다고 향나무가 죽겄어유? 죽을 때가 됐으니 죽겄지. 그라고 향나무보다는 능소화 꽃이 더 보기가 좋네, 뭐!”라고 말하곤 내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팽 가버렸다. 나는 빌라 주민들 몰래 능소화를 베어버릴까 궁리를 하며 봄을 보내고 있었고 봄은 깊어졌다.

장미의 계절 오월이 오자 당연히 장미가 왁자지껄 피었다. 장미도 다른 장미들은 다 사라지고 덩쿨장미만이 온 동네를 덮어버렸다. 그나저나 장미가 피어서 오월은 찬란했다. 왜, 언제 다른 종류의 장미들은 사라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덩쿨장미의 매력만으로도 나쁘지 않아 금새 잊어버렸다.

어느새 초여름이 됐다. 능소화도 피어버렸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향나무는 허옇게 잎을 말려가고 있다. 그나마 초록을 유지하던 향나무 잎이 녹두색으로 변했다. 자세히 살펴야 향나무가 보인다. 이미 능소화가 물살을 가르는 물뱀처럼 빠르게 넝쿨로 향나무를 뒤덮고 향나무 둥치를 친친 감아 숨통을 조였기 때문이었다. 능소화 잎이 무성하여 향나무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자세히 잘피지 않으면 이제 향나무인지 능소화나무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러나 아래 숨통이 막혀 죽어가고 있는 나무가 향나무라는 걸 아는 나로서는 능소화에 대해 거의 공포에 가까운 마음이 든다.

능소화는 잎만 무성한 게 아니다. 꽃의 갯수도 많고 꽃의 크기도 커서 두겹으로 향나무를 조여죽이고 있다. 아니, 세겹이다. 줄기가 향나무의 원기둥부터 주요 가지라는 가지를 친친 감아 숨을 못 쉬게 하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줄기의 조임이 향나무의 직접적 사인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자라지 못하게 조이고 햇빛을 가려서 죽이고 있다. 아무리 무지몽매한 식물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저에게 처음 버팀목이 되어준 친구에게 저럴 수가 있을까.

이런 저런 사실을 몰랐을 때는 능소화, 그 이름조차 참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제 능소화의 저 사악하고 잔악한 성질을 알고 나자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멍게의 속살을 닮은 연한 주황빛 꽃이 농염한 여인인 냥 고혹적이다. 이미 떨어져 누운 꽃마저 예쁘다. 그러나 나는 “고혹은 얼어죽을…. 웬늠의 꽃이란 것이 저렇게 제 욕심에 눈이 가려 시집도 못 간 노처녀처럼 징그럽냐!!”며 외면했다. 앞으로 나는 멍게회를 먹지 말아야겠다. 아니면 더 잘근잘근 꼭꼭 씹어서 먹어주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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