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 대한 작은 깨달음
생명에 대한 작은 깨달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7.15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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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혹시, 우리는 생명에 대해 깨닫기 위해 황송하게도 사람이라는 생명으로 태어난 건 아닐까? 생명에 대해 안다는 게 너무 광막해서 해보는 소리다. 그래서 내가 생명에 대해 깨달은 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는 고백을 미리 하고 얘기를 시작하고 싶다. 실로 살아 있다는 건 풀 한 포기에서부터 이 지구와 온 우주가 모두 하나로 위대하다.


모기도 위대한 생명이라고 할까 말까? 아이고 가려워라. 요런 방정스런 늠이 금새 물고 간 모양이다. 가려워 죽겠다. 그래도 얘기가 얘기인 만큼 모기도 위대하다고 하자. 아니, 모기도 위대하다. 그 작은 몸으로 자기보다 수천 배, 수만 배로 커다란 사람을 이렇게 치명적으로 타격하다니. 이렇게, 치명적으로 가렵다니!! 나를 물고 간 모기는 안 위대하다, 내 맘! 일단 물파스를 바르고 계속하자.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두 아이들을 키우며 매를 아끼지 않았다.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매를 아끼면 아이를 버린다’는 이상한 격언 때문이었다. 나는 결심했다. 악마 같은 엄마가 될지언정 아이를 버리지는 않겠다. 그런데 이 결심이 너무 무식하고 징그럽게 단단했던 모양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금 너무 후회하고 있다. 생명이 상할 정도로 아이를 작살냈으니….

큰 아이는 성품이 순하고 행동이 느렸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성질이 겁이 많고 게으른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불행히도 나는 후자로 큰 아이를 정의하고 말았다. 따라서 큰 아이는 겁쟁이를 타파하고 게으름을 개조하지 않으면 인생을 실패해서 쓰레기가 될 불행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매를 들지 않았다고 해도 이것만으로도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명은 행복 자체다. 그런데 나는 그 행복 자체를 불행 자체로 정의하는 아주 악랄한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도 내 자식을 말이다. 이 죄를 어떻게 해야 속죄가 될지 실로 암담하다. 너무 가슴이 아파 글이 안 된다. 한 번 시작하면 일사천리로 써버리는 게 내 특긴데…. 암담하다는 말을 너무 빨리 해버린 탓도 있겠으니 말머리를 틀자.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침 자습활동으로 한문을 공책 한 쪽을 쓰고 익히는 일을 했다. 근데 큰 아이는 아홉시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다 못 썼다. 그런 사람은 점심시간까지 쓰라고 한 두 번째 기회도 놓쳤다. 공책은 딱 한 줄 반 쓰는 데서 그쳐있었다. 그런 사람은 수업 마치고 3시까지 쓰고 돌아가라고 선생님은 세 번째 기회를 주시곤 잊어버렸다. 근데 큰아이 혼자만 다섯 시가 되도록 다 못 썼을 뿐만 아니라 다 쓰기를 기다려주는 친구들과 교실 복도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았다. 내가 아이의 귀가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찾아갔을 때까지 뛰고 놀고 있었다.

집으로 데리고 와서 매를 들고 두 시간에 걸쳐 훈도를 했다. 말이 훈도지 온갖 폭언과 함께 매질을 했다. 그렇다, 명백히 폭행이었다. 아이는 거의 의식을 잃을 정도로 벌벌 떨며 견뎠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그런 강도로 폭행을 한 게 두 번인 것 같다. 당연히 잊혀지지 않는다. 잊혀지지 않아야 마땅한데 잊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간절하다.

둘째는 조금 덜 때렸다. 그러나 둘째가 손톱을 물어뜯을 때 한 번은 폭행이었다. 말로는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듣는 다는 성급함이 폭행의 원인이었다. 손톱을 물어뜯는 것부터가 책임은 부모인 나에게 있었다. 아이를 때리기 전에 왜 손톱을 물어뜯는지에 대해 애정 어린 관심과 관찰이 있어야 했다. 불문곡직, 나쁜 버릇은 애시에 개조해야 한다는 강박이 관심과 관찰보다 먼저 작용했다.

내 죄에 비해 두 아이는 올바르게 성장해주었다. 그러나 죄에는 대가가 따르는 엄연한 사실을 피할 수는 없었다. 큰 아이는 독신주의를 요지부동으로 고집하고 있다. 작은 아이는 연애를 하면서도 연애를 갈구한다. 즉, 만족을 모른다. 이 사회는 관계로 연결되는데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만족을 모르면 자꾸 달라고만 할 것 아닌가! 사랑도 더 달라, 돈도 더 달라, 우정도 자신이 주는 것보다 더 받겠다고 설치면 부모인 나도 미운데 타인들은 어떻겠는가. 이러니 일일이 부침의 시간들이다. 둘째가 가는 곳마다 시기와 질투와 거부가 복병처럼 끈질기게 포진하고 있다. 둘째는 애정결핍이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프고 후회가 무겁다. 그럴 수만 있다면 딱 죽어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으니 무지하고 악랄한 나의 성질머리는 딱 죽이고 사려 깊고 올바르고 예의바른 나의 원래의 생명을 용현할 수 있다는 걸 대철인 석가모니가 밝혔으니 그 교훈을 감사하며 따르기를 서원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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