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통한(痛恨)의 칠만의총 별곡(別曲)
400년 통한(痛恨)의 칠만의총 별곡(別曲)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9.2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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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천년의 진주지만, 천고만고(千古萬古)의 시름과 아픔으로 우리는 살아왔다. 계사년(癸巳年) 6월, 하늘과 땅이 죽음처럼 무너진 그 날! 여기 이곳 초록의 평화로 살아온 진주진양이라는 그 땅이 느닷없이 이웃 살인마의 잔학한 탐욕의 본능인 추악한 살육으로 지구상에서 영원히 묻혀질뻔 했노라.


다시 말하면 지구 역사상 그 선례를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완벽한 초토(焦土)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사람은 물론 하늘을 나는 새, 그리고 땅속의 모든 벌레들까지 그 모두가 일루의 흔적도 없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분하고도 원통하구나! 이 원수를 어찌 갚을꼬! 이 원수를 어찌 갚을꼬! 어이하리, 어이하리, 정말정말 어이하리.

선혈(鮮血)의 핏빛 누더기로 죽어간 우리진주의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핏덩이 아이들까지 참혹하게 낭자(狼藉)되매 그 통곡과 아픔의 눈물, 진홍의 피가 남강으로 흘러흘러 푸르디푸른 남강물을 깜깜한 지옥의 강으로 변하게 했다. 420년이 지난 오늘 남강에 가면 7만영혼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분하고도 원통하구나! 이 원수를 어이하리! 이 원수를 어이하리!
어이하리, 어이하리, 정말정말 어이하리.

그 때 그날 이후 진주인들은 그 통한의 420년간 무엇을 생각해 왔으며, 무슨 일을 해오며 살았는가! 지난날 아픈 과거를 모두 잊고 살았는가! 아니면 선대인(先大人)들의 죽음 같은 그 아픔을 잊고 살았는가!

1592년 4월 임진년에 부산 동래에서도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 이하 수백 명의 군관민이 순절(殉節)했고, 동년 8월 충청도 금산에서도 의병장 조헌 이하 칠백명의 의병이 순절했으며, 그 후 1597년 7월에 전라도 남원에서도 전라병사 이복남과 구례현감 이하 만여 명이 순절했도다.

그러나 당시 동래, 금산, 남원에서는 당시 지역민들이 즉각 그 많은 시신(屍身)들을 거두고 안치(安置)하고 합장(合葬)하여 참담한 그 원혼(冤魂)들의 명복을 빌 수 있는 의총(義冢)을 만들었는데, 이곳 진주는 그 당시는 물론 4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세계 전사상(戰史上) 최다의 진주 선령들의 처참한 죽음을 그대로 방치(放置)하고 못본체 해온 그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도 진주의 하늘에는 망자(亡者)들의 곡소리가 진동(振動)하고, 남강은 여전히 진홍의 핏물이 주검처럼 흐르고 있지 않은가?

분하고도 원통하구나! 이 원수를 어이하리! 이 원수를 어이하리!

어이하리, 어이하리, 정말정말 어이하리.

그래도 여전히 칠만의총에 대한 본질적 의미나 그 건립의 필요성의 대한 절실한 의지가 없다면, 진주에서 지금까지 수십년간 진행되어온 수많은 축제, 예술제 그리고 심지어 여러 제향(祭享)까지도 향후 직속적인 존립의 가치가 진정 있는지 다시 한번 우리모두 심사숙고(深思熟考)와 반성(反省)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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