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을 왜곡한 일제
단군을 왜곡한 일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11.06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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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경남국학원 이사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강제로 한일병탄을 체결한다. 그리고 동화정책의 최우선으로 조선의 유구한 상고사를 조작, 왜곡하기 위해 우리의 상고서(上古書)를 수집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취조국의 조선사료 강탈기간 중이던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발족하여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뀌었으나 다시 학문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하여 1925년 6월 일황 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확대 개편되어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역사 자료의 수집방안이었다.


초기에는 강제 수색과 압수를 통해 사료를 수집했으나 수장 자들이 비장(秘藏)하여 수집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1937년까지 27년간 전국을 누벼 조선 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고, 전국 도·군·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할 것을 강력히 지시하여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샅샅이 뒤졌고 지방에서는 향교, 서원, 구가, 양반가, 세도가를 뒤져 다음 해 12월까지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 금지한 서적과 수서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권이 넘었으며, 1932~1938년 식민사관에 기초한 조선사 37책, 조선사료총간 20종, 조선사료집 3책을 간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마다 한국사의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 이마니시(今西龍)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1921년 단군고라는 ‘단군신화설’을 조작하여 경도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또한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부일 역적들인 이완용, 권중현, 등과 어용학자 이병도(이완용의 집안), 신석호 등을 위촉하여 한민족의 뿌리인 국조 단군조선부터 신화로 왜곡하기 시작하게 된다.

1916년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때는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상고 삼한(上古 三韓), 즉 ‘단군조선’을 집어넣기로 결의했으나, 1923년 조선사편찬위원회 제1차 위원회에서는 단순히 삼국이전이라 축소하여 놓고, 1925년 조선사편수회 제1차 위원회에서는 삼국이전 과 삼국시대를 줄여 신라통일 이전 한편으로 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마다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 일제는 조선사 가 공명정대한 학술적 사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편찬체제를 ‘편년체’를 사용했는데, 당시 사학계에 주름잡았던 실증사학(기록에 있는 사료에 의존함)을 보장해 주는 듯이 간주되었던 것이 편년체였는데 일제의 근본목적은 그들이 취사선택하여 남긴 사서를 기준으로 연도가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단군조선’을 제외시켜 버리려는데 있었다.

단군조선의 왜곡과 말살을 위해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되는 사서들을 수집했던 일제는 단지 고려시대 중엽과 말엽의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와 삼국유사(三國遺事 1285년) 만 우리의 최초 사서라고 남겨놓고, 그 이전의 사서들은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빼돌렸다. 무엇보다 단군조선 과 삼국이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사대주의 사관의 삼국사기와 단군조선을 불교의 입장에서 각색한 삼국유사 두 사서는 일제가 단군조선을 부정 4332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역사를 말살시키는데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는 좋은 자료가 되어 지금까지 우리는 상고서 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있는 것으로 알았지만 반만년의 역사의 증거 자료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환단고기, 부도지’ 등이 세상에 알려져 단군신화라는 단어가 교과서에서 사라졌으니 만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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