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우의 창조정신
공병우의 창조정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12.1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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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1930년대 서울의 무교동 입구에 공안과 의사가 있었는데 서울에서 병원도 의사도 귀하던 시대 이름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공병우(公炳禹)는 1907년 1월 24일생으로 평북 벽동에서 팔삭동(八朔童)이로 태어났다. 의과대학도 다니지 않고 독학과 강습교육으로 1926년 조선의사 검정시험에 합격 우리나라 최초의 안과의사가 되었다. 일생동안 빨리빨리를 생활신조로 삼고 살면서 1936년 일본나고야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아 1938년 공안과를 개업 국내 처음으로 쌍꺼풀 수술을 했고 1958년 처음으로 국산 콘택트렌즈를 개발했다. 30대 초반에 눈병 치료를 받으려 왔던 한글학자 이주로 선생을 만난 것이 그의 일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그 뒤로 한글 시력표(視力表)를 처음으로 만들고 고성능 한글 타자기를 발명했다. 점자 타자기와 세벌식 한글 워드프로세서 매킨토시용 무른모 한손 자판을 개발했다.


1988년에는 한글 문화원을 설립해 한글 글자꼴과 남북한 통일자판을 연구했으며 1990년에 아흔 가까운 나이에 초기 PC통신 사용자 중 한사람이 돼 ‘훨씬 속도가 빠르고 과학적’이라며 세벌식 자판의 장점을 알리는 글을 매일같이 하이텔에 올렸다. 그러면서 자동차 연구가와 사진작가로도 활동했다. 1995년 세상을 떠나면서 “내 죽음을 알리지 말고 장기와 시신은 모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평소 시간이 뭐라고 생각합니까하고 물으면 대답이 타자수가 “시간은 돈”이라고 대답하자 공 박사는 “아닙니다. 시간은 돈보다 더 귀한 생명입니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 옷치장에 시간을 써서야 되겠느냐”며 한복을 입지 않았고 양말 고무줄은 잘라 버렸으며 이발소에서 5분만에 머리를 깎고 약속 없이 찾아온 손님은 다시 약속하고 만나자고 돌려보냈다.

드나들 때 불편하다며 집안 문지방을 모두 톱으로 썰어버리고 방안에 양변기를 만들어 놓았다. 1950년대엔 나라의 미래를 위해 미국에서 콘돔을 대량 들여보내다가 세관에서 ‘풍기문란용 기구’라며 적발당하는 일도 있었다. 일생을 바친 한글사랑이 남달랐으며 이름도 한글로만 표기했다. 컴퓨터의 효시는 1946년 미국 벨리스틱 연구소에서 제작한 에니악(30t)이다. 1940년대에는 진공관을 1950년대는 트랜지스터, 1960년대에는 집적회로(IC), 1970년대 이후는 고밀도 집적회로(LSI), 초고밀도 직접회로(ULSI)를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과학기술원 전길남 교수가 도입 한국에 인터넷을 보급하였다.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 생활의 편리성 안락성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정신적 중압감은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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