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 조충(趙沖)
문정공 조충(趙沖)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12.28 1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호석/진주문화원·향토사학자

문정공(文正公)조충 장군의 조부는 상서 좌복야 조시언(趙時彦)이며 부친은 문경공 조영인(趙永仁)으로 고려사에 입전된 큰 인물이다.

조영인의 처는 윤관의 손녀로 장남 조준(趙準)은 최충수의 사위로 병부시랑을 제수 받았고 좌승선 동지공거로 진사시를 주관했다.
조영인의 차남 조충은 최선의 딸과 혼인해 슬하에 3남 5녀를 낳았다. 조충의 장남 조백기는 공부원외랑을 거쳐 무관이 되고 차남 조숙창은 연경궁 녹사가 되고 고려사에 입전된 큰 인물이다.
셋째 조계순은 최충헌의 딸과 혼인하고 계순의 아들 조변은 김방경의 딸과 혼인하고 보한집의 저자 최자는 조충의 손자사위가 되는 등 당대의 권문세가와 혼인으로 연결된다.
조충 장군은 서기 1171년 출생했는데 모친이 출생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약관에 음서로 도감 판관이 되고 대학에서 공부할 때 여러 번 우등을 차지해 상사에 올랐다.
1190년에 진사시에 급제해 합문지후. 호조원외랑이 됐다. 1196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1209년 5월 국자감 제주(총장)로서 추씨의 2세조 추영수(秋永壽)를 장원급제 시켰다.
희종 7년에는 대사성 동지공거로서 진사들을 선발했다. 고종 3년(1216년)에는 추밀원 부사. 상장군. 한림원 학사가 되었는데 문관으로서 상장군을 겸한 일은 문극겸 이후 처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고종 즉위 후 북방 대륙에는 몽고가 일어나 여진족이 금을 압박하고 만주에는 걸안족이 대요국을 세웠다.
고려국은 참지정사 정숙첨을 원수로 조충을 부원수로 삼아 적을 치기로 했으나 정숙첨은 패하고 조충 장군만 홀로 이겼다.
고종 4년에 원수를 정방보를 임명했으나 성과가 없자 파직 당했다. 이 때 조충 장군을 서북면 병마사로 삼아 나아가니 크게 승리했다. 몽고는 군사 만명을 거느리고 단적을 친다는 명목으로 고려로 와서 형제의 맹약과 식량을 요구할 때 서북면 원수 조충이 적절히 조치했다.
다음 해 조충 장군은 몽고의 연합군이 걸안족을 소탕할 때 협전하고 포로 6백명을 돌려 받았고 걸안족을 위해 걸안장을 설치해 주었다.
조충 장군은 최충헌의 묘지명을 지었고 몽고병 2만 여명이 침입했으나 조충 장군을 존경해 큰 피해가 없었다.
전역한 다음 문하시랑 평장사. 수문전 태학사. 판병부사에 올랐다. 50세가 되자 독락원을 지어 사대부들과 금주를 즐기다가 1220년 9월 3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987년에 신종원(辛鍾遠:현 한국학 중앙연구원)교수께서 묘지명을 발굴해 공개했었는데 1989년 5월에 지방 유형문화재 110호로 지정됐다.


추 호 석 향토사 011-583-1874 010-5777-664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