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경제(中國經濟)의 전개과정(Ⅰ)
중국경제(中國經濟)의 전개과정(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2.2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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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지금까지 중국의 정치, 문화, 인간사회 등에 대해 알아보았다. 지금부터는 중국경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중국의 경제는 원시경제에서 농업경제로 진입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 시대를 구분할 때 대강 상고(上古) 경제사를 원시경제에서 진(秦)의 통일까지(BC 221)로, 중고 경제사를 진 ‧ 한(秦漢)에서 송초(宋初, 960)까지로, 근고 경제사를 송대에서 명말(明末)까지로, 근대 경제사를 청대의 경제변혁으로 각각 그 발전상의 특성을 논할 수 있다.

신농씨(神農氏)의 농작 창시와 하우(夏禹)의 치수(治水)로 농업이 단순한 생활 수단으로서의 원시 단계를 벗어나, 주(周)대엔 부락적인 경제상태에서 봉건 경제체제로 진입했고, 춘추전국 때에는 봉건제도의 붕괴와 함께 자유경쟁의 경제체제를 형성했다.

중고(中古)시대에는 경제상의 창제가 많아 중국 고대 경제의 황금시대를 이루기도 했다. 진시황(秦始皇)의 통일정책이나 한무제(漢武帝)의 통제경제로 비록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중농(重農)을 제창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억상(抑商)정책 때문에 상공업은 계속 부진하다가 명(明)대에 반복되는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으로 부강을 기할 수 있는 생산업은 끝내 침체한 채 근대에 이르렀다.

만청(滿淸) 정부의 300년에 걸친 경제 폐쇄정책은 중국을 하나의 후진국가로 전락시켰다가, 청말(淸末)에 「민생은 역사의 중심이 된다(民生爲歷史的中心)」는 손문(孫文)의 민생사관(民生史觀)의 제창과 때를 같이하여 생산국가로 전향하면서 지금 서서히 가난을 극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중국의 경제의 이해(理解)를 위해 고대로부터 중요한 사상을 살피기로 한다.
중국의 경제는 그 이상이 춘추전국 시대에 유가 ‧ 법가 ‧ 묵가 ‧ 도가 등의 사상가들에 의하여 청사진을 드러낸 바 있었다. 비록 경제체제가 정립되지 못한 고대였지만, 치국의 근본을 부민(富民)에 둔 공통적인 이론을 펼치고 있다.

공자는 교육에 앞서 부(富)를 강조했고, 무치주의(無治主義)를 주장한 노자(老子) 또한 의식주(衣食住)의 필요를 인정했거니와, 맹자는 백성의 기아(飢餓)를 폭정의 소치라 공박했고, 관자(管子)는 부민(富民)이 곧 정치라고 못박았는가 하면, 한비자(韓非子)는 인간의 투쟁은 경제의 궁핍에 있음을 지적했다.
이렇게 경제의 필요성을 공인한 춘추 전국 사상가들은 경제이론 면에서 한걸음 구체화시키고 있다. 유가들은 민본(民本)에 경제의 이상을 세웠는지라 공자는 생산보다 분배의 균등을 강조했고, 이를 따라 순자(荀子)도 분배의 균등을 요구했다.

이 밖에 맹자는 자급자족의 원칙 아래 생활 해결을 위한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농사철을 확보하라고 주장했는가 하면, 순자 또한 여기에 등조했다. 나아가서 맹자는 토지공유의 주장으로 정전제(井田制)를 제의했고, 세금을 낮추고 구제책을 세우라는 등의 중농(重農)사상을 보였다.

한편 유가들은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지적했고, 국고(國庫)를 위한 수탈을 반대하기도 했다. 유가들 중에도 성악설(性惡說)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을 경제생활의 급선무로 타진한 순자(荀子)는 공정한 사회를 위해 도량분계(度量分界)를 주장했고, 동시에 여건에 따른 정치를 요구하였는가 하면, 자유무역론이나 과세 감면에 대한 이론도 밝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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