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 보수 공로자 강주수
촉석루 보수 공로자 강주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3.1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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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향토사학자

강주수(姜周秀)선생은 진주시 대안동 출신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명치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마침 진주고. 진주여고 설립을 추진할 때 발기인이 되었고 일신여고 기성회 위원으로 봉사하면서 진주지역에서 각종 분야에 봉사자로 큰 역할을 감당한 분이다.
1927년 11월 일신교육재단 평의원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여러 봉사단체를 위해 기부금을 제공했다.

1934년 촉석루를 보수할 때 동참하고 창렬사를 중건할 때도 기부금을 제공했다.
1934년 진주에서 창간된 <영남춘추>의 인쇄인이 되고 1935년 1월 창간된 <중앙공중보>인쇄인이 되었는데 그 당시 원본을 발굴한 진주신문사에서 1995년 5월 영인본을 발간했다.
진주여고 학급증설위원과 진주하주운송(주)상담역을 역임하고 1937년 9월 진주고. 진주여고 영구이사장 김기태 대지주가 기증한 5백석 토지에 대한 감정위원으로 활동했다.

1938년 5월 진주여고 재단 상무이사 재직중 공립으로 전환하고 경남도에 기부할 때 일제의 압박으로 기부안에 서명했다고 전해 온다.

진주시 대안동 일원에 소재했던 진주권번을 1939년 11월에는 자본금 5만원으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감사와 이사로 선임되기도 했다.

강주수 선생은 1년에 소작료 6백석을 받는 지역 부호였기 때문에 진주중학교 학부형회 평의원과 중앙시장에 진주어채(주)이사로 선출됐다.

1941년 8월 진주여고 재단 상무이사를 지내고 1942년 1월부터 진주건흥(주)취재역이 되고 진주예기 권번(주)이사장을 역임했고 시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1950년 9월 촉석루가 비행기 소이탄에 의해 목재부문이 소실되자 한달간 울면서 밤을 새웠다는 말이 전해 온다.

그러므로 고적보존회가 조직될 때 회장이 되었고 1957년 5월 22일 오후 3시에 이승만 대통령께서 장경근 내무장관. 경남도지사를 대동해 내진했을 때 안내역할을 했고 촉석루 보수문제를 제기해 승낙을 받는 일을 주도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귀경하자 바로 문교부장관이 국비와 공문으로 하달하면서 촉석루를 원형대로 복원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강주수 선생은 전국의 최고의 목재 기술자들을 찾아 내 초빙했다.

강주수 선생은 촉석루 보수공사를 시작하고 상량식. 준공식이 끝날 때 까지 새벽부터 밤중까지 촉석루를 돌며 독려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촉석루 큰 보수의 으뜸 공로자. 완벽한 공로자로 1960년 11월 큰 공로자로 감사장을 받았고 공적을 기리는 목비가 촉석루 입구에 건립됐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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