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의 철학
귀의 철학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3.2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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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우리 인간들의 얼굴에는 그 좌우에 귀라고 하는 물건이 하나씩 붙어 있다. 응? 무슨 엉뚱한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렇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게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보통 이 사실을 특별히 주시하지는 않는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내 가까운 사람 중 하나가 갑자기 한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남들이야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겠지만 본인에게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되니 한평생 자기 눈에는 보이지도 않던 귀라는 것이 관심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가는 가운데 나는 또 고질적인 철학병이 도져 이런 물음을 묻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도대체 귀란 무엇인가. 이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귀는 소리를 듣는 기관이다. 그리고 말을 듣는 기관이다. 이 덕분에 우리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라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는 물론 온갖 아름다운 음악들이나 연인의 감미로운 속삭임 같은 것도 향유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귀는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축복이 평소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가려져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 귀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듣는다. 그 의미가 결코 작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특별히 고려해야 할 것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말을 듣는다, 듣지 않는다 하는 것은 결코 별것 아닌 이야기가 아니다. 어릴 적부터 말을 잘 듣는 아이는 부모를 기쁘게 해 칭찬도 듣고, 말을 잘 안 듣는 아이는 부모의 속을 썩이고 혼이 나기도 한다. 이 사실에서도 이미 드러나지만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덕이고 미덕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이 세상의 실상은 어떠할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도덕적인 귀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대체로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듣기보다는 자기 말을 먼저 하고 그것을 먼저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어떤 이들은 남의 말 따위에는 아예 귀를 막고 살기도 한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먼저 하라’, ‘입보다 귀가 먼저’라는 도덕은 지켜내기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일전에 어떤 인문학 강좌에서 한 강사가 ‘성스럽다’는 ‘성’(聖)자를 분석하면서 ‘그 글자에 귀 이자와 입구자가 있는데 입보다 귀를 먼저 쓰게 된다. 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먼저 하는 게 성스러움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 재치에 무릎을 친 일이 있다. 그런 해석이 문자학적으로 사실인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재미있고 의미있는 해석임에는 틀림이 없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먼저 하는 태도는 분명 훌륭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순한 사실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 내지 존중 혹은 우선’이라는 정신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입이란 ‘나로부터 남에게로’ 라는 능동적인 방향성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 귀란 기본적으로 ‘남으로부터 나에게로’ 라는 수동적인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귀와 듣기를 앞세운다는 것은 곧 그 저편에 있는 남의 존재를 귀기울이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귀는 그 자체로서 이러한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는 철학을 담고 있다. 그 타인이라는 것은 천태만상의 ‘소리’를 지닌 존재다. 그 소리란 어떤 점에서 희망의 소리요 부탁의 소리다. 그것은 또한 의견이고 판단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한 ‘인간’이 있는 것이다. 그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각자각자 고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굳이 거창한 ‘이타’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준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질서를 위해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그리고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쳐지고 훈련되어야 할 덕성의 하나가 아닐까. 소위 동일자와 타자라는 이분법의 극복을 위해 소리를 높였던 레비스트로스, 푸코, 데리다 등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의 기본 정신도 결국은 이런 ‘귀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지난 수십년 참으로 많은 말들을 이 나라 지성계를 향해 외쳐왔는데 그 대부분은 제대로 들어주는 귀를 만나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져갔다. 사람들이 나의 이런 목소리에도 이제 한 번 쯤은 제발 좀 귀를 기울여줬으면 좋겠다.

아니, 그러고 보니 들어주는 귀가 아예 없지는 않았던가? 지난 해 보스톤에서 특강을 했을 때 열심히 들어주던 몇몇 청중들에게 감동해 이런 말을 남겼던 게 새삼 떠오른다. “진정한 언어는 언젠가 어디선가 그것을 들어주는 귀를 만나게 된다.” 어쨌거나 이런 말로라도 좀 위안을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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