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모 삼천지교
맹모 삼천지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5.2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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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와 공부기간을 다 마치지 않고 돌아온 아들에게 짜고 있던 베를 끊어 교훈을 준 단기지훈(斷機之訓)의 고사로 유명한 맹자와 그의 모친.


맹자는 중국 전국시대 유교사상가로 공자사후 100년 정도 지난 후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맹자는 현 산동성의 추현지방인 주나라 사람이며, 노나라의 귀족인 맹손(孟孫)씨 집안의 자손이라 전해지고 있다. 공자와 같이 맹자도 아버지를 일찍 잃었는데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네 살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배려와 지도 속에서 자랐다. 맹자와 그의 모친은 처음에 공동묘지 근처에 살았으나 맹자가 언제나 시체를 매장하고 장례식을 올리는 놀이를 하자 그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고 팔고 하는 놀이를 함으로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니 비로소 맹자가 공부하는 흉내를 내었다. 즉, 아들을 기르는데 좋은 환경을 찾아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그 당시부터 유명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젊었을 때 노나라로 유학하여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에서 배우고 뒤에 제자들과 양나라의 혜왕, 제나라의 선왕, 추나라의 목공, 동나라 문공 등에게 유세를 하고 돌아다녔으며 말년에는 향리(鄕里)에서 후진들을 지도하며 그가 제후들이나 제자들과의 대화내용을 엮어 맹자(孟子)를 집필했다.

맹자는 오랫동안 읽히지 않다가 당나라 때 한유가 이 책을 세상에 밝혔고 그것이 북송에 계승되어 차츰 중요시 되었으며 남송의 주희가 4서의 하나로 삼았다. 공자와 맹자는 성격상 차이점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자는 내성적이고 세련된 선비였으며 조심성이 있고 말하기 앞서 깊이 생각하는 반면 맹자는 외향적이었으며 그 시대의 위대한 예언자로 그의 재치는 널리 주목을 끌었다. 공자는 어려운 질문을 받게 되면 머뭇거리기도 했으나 이와 달리 맹자는 그의 적대자들을 몰아치는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맹자는 인성론(人性論)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는 성선설을 내세우고 그 증거로 사람의 마음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인이예지(仁義禮智)라는 4덕의 싹이되는 4가지 마음이 있는데 측은지심, 수은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그것들이다. 이를 사단설(四端說)이라 한다.

사단설을 바탕으로 오륜(五倫)이 있다. 부자 사이에는 친(親)이, 군신사이에는 의(義)가, 부부에는 별(別)이, 장유(長幼) 사이에는 서(序)가, 붕우(朋友)사이에는 신(信)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다. 맹자는 외향적이며 예언자로 재치는 널리 주목을 받아 공격적 입장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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