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도시 화성에서 정조대왕을 만나다
꿈의 도시 화성에서 정조대왕을 만나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10.2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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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순애/창원 삼계중 도서관 사서
경남학교도서관연구회 회원
가을로 접어드는 화창한 9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경남교육포럼 독서문화교실에서는 김준혁의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라는 책을 읽고 수원 화성으로 문학기행 떠났다. 책으로 만났던 화성행궁을 직접 본다는 설렘과 정조대왕이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화성의 모습이 어떠할지 궁금하여 며칠 전부터 기분은 들떠있었다.

정조는 신도시 수원에 농업 및 상업기반을 갖추고, 성곽을 축조하고 강력한 군대를 설치하여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도시를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조선 사회 개혁을 위해서는 국왕과 함께 개혁을 주도할 선진적 인물과 도시가 필요했기 때문에 수원 화성에서 그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사도세자 묘소를 이전하는 것은 부친에게 효도 뿐 아니라 사도세자의 정통성을 세워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기에 우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천봉하고 팔달산 동쪽의 넓은 들판으로 수원 신읍치를 건설하게 되면서 새로운 수원이 시작되었다.

화성에 도착하여 처음 내 딘 곳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진찬연을 벌였던 봉수당과 국왕이 친히 나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과 죽을 나눠줬던 신풍루 앞마당을 거닐면서 200년 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정조는 문과 무를 함께 발전시키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계책이라고 생각하여 규장각과 장용영을 설립하여 나라를 이끌었다. 화성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으로 팔달산 꼭대기에 위치한 서장대에 올라보니 서장대에서 화성의 모든 군사를 지휘했을 정조의 모습과 연무대에서 장용영 군사들이 국가를 위해 온몸을 던져 훈련하는 함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백성의 풍요와 번영의 상징인 팔달문, 군사 시설물인데도 선비처럼 우아한 자태로 세계인들을 감동시키는 공심돈, 성 안 평지에 지어진 봉화대와 돈대가 결합한 봉돈, 가장 위력적인 군사 무기였던 쇠노가 설치됐던 노대 등 화성은 당당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특히 화홍문(華虹門)은 아름다운 무지개문이란 뜻으로 크고 작은 돌덩어리를 자연스럽게 조화시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이자 수문으로 만들었고, 그 위에 누각을 만들어 그림 같은 경관을 연출했다. 화홍문은 다리와 수문역할은 물론, 누각을 설치하여 성 안팎 백성들이 누구나 편히 쉴 수 있는 쉼터와 성곽 본연의 방어 역할까지 수문의 취약 부분이 전혀 없는 철옹성라 할 수 있다. 수문 하나에도 이러한 여러 기능을 생각하여 지은 정조의 애민정신을 옆볼 수 있었으며, “화성안 모든 누각들은 양반과 평민이 모두 이용하게 하라”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정조의 한평생 지향한 평등정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 정신이 지금도 전해져 대부분의 누각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옛날 백성들이 힘든 농사에 잠시 땀을 식혔을 방화수류정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기행의 피로가 모두 풀리는 듯하였다.

백성의 안녕을 위한 장안문은 애초 정약용이 계획한 대로 성곽의 길이를 3600보(4.2km)로 만들기 위해 화서문, 장안문 북수문인 화홍문 등을 일직선으로 만들기로 했지만 그 곳에 백성들의 집을 헐고 장안문을 지을 것이란 말에 정조는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성문을 저 백성들 집 밖으로 쌓으라.” 이렇듯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으로 장안문 터는 원래 위치가 아닌 민가 밖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10년 예상했던 화성 축성이 3년도 채 안 돼 마무리되었다는 것은 국왕에서부터 승려와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망라하여 한 뜻 한 마음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화성 축성에도 땡땡이꾼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하다 다친 일꾼들을 위해 요즘의 산재보험과 비슷한 것을 적용하였는데 이것을 악용하는 일꾼이 나타났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살아가는 것은 비슷한가 보다.

화성행궁은 화산 현륭원 참배 목적 외에 정조가 1804년 양위 후 화성에 내려와 노후를 보낼 시설이었다. 백성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자 했고 백성을 위하는 길이 진정 무언인가를 신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정조의 꿈은 1800년 6월 정조의 죽음으로 끝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안타깝기만 했던 화성이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기쁨도 찾아왔다. 화성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것을 복원했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데 어려움도 있었지만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따라 철저하게 복원된 것임을 받아들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다. 또한 화성을 축성하면서 상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기초를 마련해 준 '화성성역의궤'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으로 남긴 '원행을묘정리의궤'가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기록의 중요성과 자기 말과 글을 사랑하고 보전해야할 책임감을 통감하게 된다.

시간에 쫓겨 화성을 다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오면서 지금도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시설물에 백성을 사랑했던 정조의 정신이 새겨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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