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中國)의 역대 상업(商業)의 전개과정
중국(中國)의 역대 상업(商業)의 전개과정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8.3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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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이번시간에는 중국의 역대 상업(商業)의 전개과정을 중세시기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의 중세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남북조시대를 지칭하기 때문에, 본 상업의 전개과정도 중국의 남북조시대부터 살피기로 한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남북조는 상업도 부진하고 화폐도 문란했으나, 불교의 전래를 계기로 인도와의 교통이 빈번해지자 무역도 있었고, 호족들이 사치를 위해 서역으로부터 보석류의 수입이 있었다.

수당시대에는 역사 이래 가장 부유했다는 수(隋)대는 대외 교통과 국제무역이 발달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607년엔 일본의 소야매자가 조공을 바치는 외에 인근 외국과의 유대를 강화했다.

수 양제(煬帝)는 무역로(貿易路)를 돈황을 기점으로 서쪽으로는 이란을 거쳐 지중해로, 남쪽으로는 인도를 거쳐서 지중해로, 북쪽으로는 천산남로(天山南路)와 곤륜북록을 따라 중동아시아를 거쳐 지중해로 각각 진출했다.
당(唐)대는 국제무역이 훨씬 활발했으니, 국경에다 여섯 개의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했는데, 그 중 안서(安西) 도호부는 천산남북로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관할하는 국제무역의 육로상 중심이 되었으며, 안남(安南) 도호부는 동남아를 관할하는 해로의 중심이 되었으니, 여기를 관문으로 일본 · 인도 · 고려 · 이란 · 타이 등 무역의 판도를 넓혔고, 국내로는 광주(廣州)가 해상무역의 문호로, 양주(揚州)가 대일본 무역의 거점으로,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은 각각 내륙의 상도(商都)가 되었다.

국제무역을 담당하는 시박사 · 사방사 등의 기관을 두어 주로 생사 · 녹차를 수출하는 대신 향료 · 상아 · 보석 등을 수입했다.

한편 상업의 거래는 거의 ‘저점(邸店)’이라는 거간(居間)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미 전당포나 사설 금융업체인 궤방(櫃坊)이 있어 상거래에 영향을 주었다.

당대를 이어 송대에도 무역이 흥성하였는데, 광주 · 항주(杭州) · 명주(明州) · 천주(泉州) · 밀주(密州) 등지에 시박사를 두어 멀리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빈번한 선박 왕래로 비단 · 금속 · 자기 들을 수출했다. 국내로는 개봉(開封)과 항주가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북송이 개국할 때에는 상세(商稅)를 감면하는 혜택도 상인에게 주어졌지만, 운수상의 ‘통과세(通過稅)’나 ‘주세(住稅)’가 과중하여 타격을 받았었다.

원대는 육상이나 해상을 막론하고 무역이 흥성했다. 상해 · 감포 · 은주 · 경원 · 항주 · 천주 등지에 시박사를 두어 대외무역을 관장했는데, 그 중에도 천주는 당시 세계 최대의 상항(商港) 열에 끼었고, 육로로 숙주(肅州)는 천산남로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직행하는 상업 요지가 되었다.

빈번한 동서의 교통으로 말미암아 ‘중국은 황금의 당이다’라고 여행기를 쓴 이탈리아의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중국에 온 것도 이때를 즈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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