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질의 관계
양과 질의 관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9.0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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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한때 우리나라의 지성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 헤겔의 철학에 [논리학]이라는 것이 있다. 그의 논리학은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른바 연역논리나 베이컨의 이른바 귀납논리와는 크게 다르다.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그의 논리는 ‘내용의 논리’,‘현실의 논리’,‘운동의 논리’,‘변화의 논리’다. 구체적 현실이 어떻게 운동-변화해 가는가 하는 논리적 구조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의 철학이 비록 ‘추상적 사변’으로 유명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자신은 ‘구체적’,‘객관적’,‘현실적’,‘이성적’이라는 것을 엄청 강조한다.


물론 그의 철학, 그의 논리학이 일반인들에게 이해되기는 쉽지 않다. 철학자들이라고 별로 다르지도 않다. 일부 헤겔 전공자들을 제외하고는 철학자가 읽어도 머리에 쥐가 나는 것이 헤겔의 철학이다. 심지어 저명한 영국철학자 러셀 같은 이는 그의 철학을 아예 철학으로 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거기서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다는 게 헤겔철학의 장점이자 매력이기도 하다. 자유롭고 다양한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응용한 것이 또한 마르크스의 이른바 유물변증법이기도 했다.

골치를 아프게 할 의도는 전혀 없다. 한 가지 그의 철학을 원용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양의 한 토막을 소개하기 위해서 잠깐 그의 철학을 언급했을 뿐이다. 헤겔의 그 논리학에 보면 ‘질이 양으로 변하고 양이 질로 변하는’ 양과 질의 관계를 논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전문적인 철학이론을 밀쳐두고 생각해보면 양이란 많고 적은 것, 크고 작은 것, 넓고 좁은 것, 높고 낮은 것, ... 그런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질이란 맞고 틀린 것, 좋고 나쁜 것, 좋고 싫은 것, 옳고 그른 것, 곱고 추한 것, ... 그런 것을 말한다. 참고로 헤겔의 선배인 칸트는 ‘하나, 여럿, 모두’를 ‘양’으로, ‘긍정, 부정[즉 이다, 아니다]’를 ‘질’로 간주했다.) 나는 헤겔에 대해 비판적인 하이데거의 철학을 전공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헤겔철학의 이런 대목(현실 변화의 논리적 구조를 논하는 대목)에 관심이 많다. 예컨대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머리 좋은 헤겔이 괜히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양과 질은 분명히 뭔가 관계가 있다. 질은 양을 변화시키고 양은 질을 변화시킨다. 이를테면 옳은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은 크고 많을수록 어떤 식으로든 질적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그른 것, 나쁜 것, 추한 것은 크고 많을수록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는 데 기여한다. (은행들-기업들의 통합이 경쟁력 향상에 기여하는 것도 그런 경우일지 모르겠다. 또한 오답이 많을수록 성적이 내려간다는 것도 한 예가 될지 모르겠다. 옳은 일도 목소리가 작고 적으면 나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비슷한 경우다.) 반면에 질적 수준이 높은 것은, 크고 강하고 많은 양적 수준을 올리는 데 역시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고품질의 상품이 수익 신장에 기여하는 것도 그런 경우일까?) 아무튼 그런 것을 헤겔은 질량의 관계, 질량의 통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사회는 어떠할까. 지금 이곳의 우리 현실에는 과연 질적 수준에 기여하는 ‘옳은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 양적으로 ‘얼마나’ 될까.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는 ‘그른 것, 나쁜 것, 추한 것’은 또 얼마나 될까. 내가 보기에, 진과 선과 미는 적고 작으며, 위와 악과 추는 참으로 크고 그리고 많다. 우리 주변에 ‘넘쳐난다’. 그것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아마 책 몇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적어도 나의 ‘건전한 이성’에 포착되는 우리의 현실은 그렇다. 당신의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당신의 동네에 도로에, 당신의 학교에 직장에, 당신의 관청에 의회에 법정에 ... 만연된 악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의 주위, 학문세계에도 이를테면 연구부정 시험부정 같은 비리가 첩첩으로 쌓여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사회의 질을, 따라서 삶의 질을, 심각하게 저하시키고 있는 핵심들인 것이다. 그렇게 양은 질을 변화시키고 질은 양을 변화시킨다.

우리가 만일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이 현실의 ‘질적 수준’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철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면서 진지하게 반성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요즘 대세대로 만일 현실의 양과 질을 ‘숫자로’ 표현해 본다면, 지금 우리의 진실과 거짓, 옳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더러움은 1에서 10 중 어디쯤에 위치하게 될까? 좀 과장하자면 전자(진-선-미)는 어쩌면 1에 가까울 것이고 후자(위-악-추)는 어쩌면 10에 가깝지는 않을까? 아마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 어느 쪽인가에 가담한다. 이는 거의 불가피한 필연이다. 방관도 침묵도 자칫하면 악에게 이용당해 그쪽에 힘을 실어줄 수가 있게 된다. 살아보니 그랬다. 우리가 마음 편히 숨을 곳은 없는 듯하다.

질을 위해서 하나라도 양을 늘려가야 하고 키워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어느 쪽에 숫자 하나를 보탤 것인가. 선인가 악인가. 질적 제고인가 질적 저하인가. 지금 이 순간도 그것이 우리의 선택과 결정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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