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義兵)
의병(義兵)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0.20 15:34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나라가 위태로울 때 정부의 명령이나 소집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우던 민병(民兵), 우리나라는 유사이래 외국의 침략을 많이 받아 그때마다 의병이 일어났으나 임진왜란때 현저한 활동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은 재정적인 곤경에 빠져 과중한 조세 공물 부역 등 일반 백성의 부담을 크게하여 각지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한편 당쟁으로 인한 정부의 무질서는 국가 전체에 크다란 혼란을 일으켜 국방은 무방비 상태에 놓였고 이틈을 타 전국시대를 통일한 일본은 조직화된 전투력을 가지고 조선을 침입 우리나라 관군은 대부분이 패전하고 1592년 5월에는 서울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주요 도로를 따라 진격하고 요충지에만 주둔군을 진주시켰다. 일본군의 세력이 미치지 못한 지역은 왜적의 침략에 항거하는 민족적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최초의 의병활동은 경남 의령에서 곽재우(郭再祐, 의령)에 의하여 일어났는데 낙동강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 한때 관군의 방해를 받아가며 일본군에 대항 4월 하순에는 의령, 삼가, 합천 등 수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인홍(鄭仁弘, 합천) 등이 각지에서 무수한 의병을 일으켜 대항하였다.

8월에는 김면(金沔, 산청)이 관군을 도와 김천 지례를 탈환 9월에는 김해(金垓)가 예안에서 일어나 경북 북부지방을 제압 일본군의 전라도 지방 침입을 견제했다. 조헌(趙憲)이 8월에 금산에서 일본군과 싸워 700여명이 장렬하게 전사(7백의총)로 호서 호남 지방에 침입하는 기회를 주었다. 고경명(高敬命) 등은 의병을 모아 금산 전투에 김천일(金千鎰)는 전국적으로 궐기한 의병이 오히려 관군 이상의 큰 활약을 하였다. 이와같은 의병의 눈부신 활약과 수적인 우세는 당시 관리의 위신이 떨어지고 서민들이 그들을 불신임하던 결과인 동시에 의병장의 대다수가 전직관리 유학자들로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큰 명문거족 들이었던 까닭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궐기하면 그의 씨족 또는 주종관계에 있던 자가 그 밑으로 모여 들었고 유랑민이나 관군의 기피자들도 합세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이며 또한 왕명으로서의 의병장의 제수(除授) 명나라 원군 등으로 사기가 높았다. 그러나 의병은 때때로 관군과 대립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반란을 일으키는 예도 있었다.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일본과의 싸움 의병활동은 그 정신에 있어서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저항운동의 기본정신이 되었으며 민족의 정기를 높이는데 있어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사실이었다. 국가가 외적의 침입으로 있을 때 자발적으로 일어나 외적에 대항 싸우는 민병 또는 의군(義軍)들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