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성곽(城廓)
수원 성곽(城廓)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1.17 18:3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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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정조(正祖 1752~1800)는 조선22대왕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로 1776년 부터 24년간 재위에 있었으며 아버지의 억울한 참화를 못잊어 왕은 양주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겨 이장하고 석물(石物) 등 어느 왕릉보다도 훌륭하게 만들었으며 달마다 멀리있는 산소에 거동을 하였고 또한 산소옆에 경모궁을 세워 세자의 사당으로 사용하였다.


대궐내에 있는 원근문은 당시 왕이 거동하던 기념문인 것으로 지었고 왕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사모하여 항상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고 한다. 후에 세자묘를 원륭원이라 하고 왕이 한강을 건너 묘소로 갈때에 길이 멀다하여 지지대(遲遲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화성행궁(華城行宮)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원화성(사적3호)은 1794년 1월부터 정조임금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축조하기 시작했다. 신건축 기술 적용과 더불어 20만 덩어리의 석재(石材), 53만장의 기와, 69만장의 벽돌 2만6천주의 목재가 사용되었고 1,845명의 장인(匠人)이 참여했다. 수원시의 주위 5㎞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발달된 형식을 갖춘 대표적 성곽이다. 이렇게 성곽으로서의 완비된 제도는 종래의 축성법(縮成法)에다 새로 개발한 신기축(新機軸)인 기중기(起重機)를 사용하였고 중국에서도 보지 못하는 기교(技巧)를 보이고 있다. 여러곳에 누대(樓臺)를 만들었고 성문(城門)으로 동쪽은 창룡문(蒼龍門), 서쪽은 화서문(華西門), 남쪽은 팔달문(八達門), 북쪽은 장안문(長安門)을 세웠다.

우리 건축의 위대함과 옛 장인들의 숨결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이 선조들의 창조물로 보며 민족적 정체성과 자존심과 더불어 겸손함을 느낀다. 당시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돌위에 각자(刻字)가 되어 있고 감독과 석수(石手)의 이름도 적혀 있다.

그 당시 몇 명이 참여했는지 기록해 놓았다. 공사 시작에서 끝까지 하나 하나 기록으로 남겨두어 현재의 공사 실명제(實名制)의 효시(嚆矢)가 되겠다. 단 한명의 기술자라도 소홀하지 않았던 정조임금의 애민사상(愛民思想)과 안전하고 튼튼한 건축물로 남길것을 염원하며 자신의 이름 한자 한자 새겨넣은 석수들의 모습이 22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려지는듯 했다. 숙종 말년에 노론 소론의 치열한 대립 영조 소론과 남인이 연합하여 노론 천하가 되었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노론 시파(時派)가 정계를 장악했다. 탕평책은 정조에 의해 인재의 고른 등용으로 당쟁이 완화하는데 기여했다.

선조들의 지혜와 기술을 오늘에 비쳐보는 새로운 성장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고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헌신적인 사고와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 불굴의 장인정신을 다시 한번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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